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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치안·소방>국방>군사제도의 변천과 평택>조선시대의 군사제도와 평택>평택의 군정軍政
■ 평택의 군정軍政

본문


평택지역은 조선전기에는 경기도의 진위振威·수원水原·양성陽城과 충청도의 직산稷山에속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기도의 육군은 모두 4개 진관으로 편성됐다. 광주목사廣州牧使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는 광주진관, 수원부사水原府使가 첨절제사를 겸하는 수원진관, 양주목사楊州牧使가 첨절제사를 겸하는 양주진관, 장단부사長端府使가 첨절제사를 겸하는 장단진관이다. 지금의 평택에 해당하는 진위·양성은 모두 수원진관에 속했다.
진위현령振威縣令과 양성현감陽城縣監이 모두 절제도위節制都尉로서 소속 지방군을 지휘했다.
충청도의 육군도 모두 4개 진관으로 편성됐고 충주목사忠州牧使의 충주진관, 청주목사淸州牧使의 청주진관, 공주목사公州牧使의 공주진관, 홍주목사洪州牧使의 홍주진관이 있었다.
직산은 청주진관에 소속돼 직산현감稷山縣監이 절제도위로서 소속 지방군을 지휘했다.
조선후기에는 지금의 평택이 충청도 평택과 경기도 진위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경기도에는 모두 6명의 영장이 있었고 모두 수령이 겸임했다. 광주부윤廣 州府尹이 전영장前營將을, 남양부사南陽府使가 좌영장左營將을, 양주목사楊州牧使가 중영장中營將을, 장단부사長端府使가 우영장右營將을, 죽산부사竹山府使가 후영장後營將을 맡고 있었으며,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별중영장別中營將을 맡았다. 진위현振威縣은 수원부 진관 관할 아래의 별중영別中營에 소속됐다.
한편 충청도에는 5개 지역에 전임專任 영장이 파견돼 소속 진관을 관할했다. 전영장이 홍주洪州에, 좌영장이 해미海美에, 중영장이 청주에, 우영장이 공주公州에, 후영장이 충주에 파견됐다. 단 해미에는 별도의 영장이 파견되지 않고, 무신武臣으로 파견된 수령이 영장을 겸임했다. 평택은 홍주 진관 관할의 전영前營에 소속돼 있었다. 평택이 포함된 전영 소속의 군사는 마병馬兵이 4초, 속오군束伍軍이 25초가 있었고 표하군標下軍이 286명 있었다.
마병은 기병騎兵이며 속오군은 보병步兵이었다. 표하군은 본부의 각종 인원들로, 대부분이 비전투원으로 구성됐다.1)
1764년(영조 40) 무렵 전국의 읍지邑誌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각 고을의 각종 통계 정보가 표시돼 있고 군병軍兵에 대한 정보도 있다. 『여지도서』에 나타난 평택과 진위의 군병軍兵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진위현振威縣에는 남자가 2,527명, 여자가 2,249명으로 인구는 모두 4,776명이었다. 그 가운데 중앙군 및 지방군으로 파악돼 있는 군병軍兵의 총수는 1,973명이었고 양 인良人이 1,131명이고, 천인賤人이 842명이었다. 그 내역은 균역청均役廳의 선무군관選武軍官이 76명,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보인保人이 72명, 어영청御營廳의 정군正軍 및 보인이 114명, 금위영禁衛營의 정군과 보인이 140명, 수어청守禦廳의 아병牙兵 및 속오束伍 별파진別破陣과 보인이 800명, 병조兵曹의 기병騎兵·보병步兵과 보인이 467명, 공조工曹의 장인匠人과 보인이 30명, 총융청摠戎廳의 정군과 여러 명색의 보인이 256명, 감영監營의 기수旗手와 보인이 18명 등이었다.
진위 소속의 군병은 주로 중앙군영에 많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금위영·수어청·총융청 등 조선후기의 중앙 5군영 모두에 나뉘어 소속 된 것은 진위현이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에 따른 것이다. 대부분은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군병이라기 보다는 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납포군納布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균역청의 선무군관이나 병조의 기병·보병, 그밖에 공조나 감영 소속의 명색들도 모두 납포군으로 파악된다. 다만 수어청에 소속된 속오군 같은 경우는 유사시에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다.
충청도 평택현平澤縣에는 남자가 2,838명, 여자가 2,883명으로 인구는 모두 5,721명이었다. 군병의 총수는 966명이었고 양인이 497명, 천인이 469명이었다. 그 내역은 좌영左 營 소속의 속오束伍 파총把摠 1인, 초관哨官 1인, 기패관旗牌官 4인, 군기감관軍器監官 1인, 토포군관討捕軍官 4인, 마병馬兵 16명, 마병보馬兵保 16명이었으며, 속오군束伍軍이 144명이었다. 병영兵營의 아병牙兵이 2명, 감영監營의 재인才人 아병牙兵이 9명, 수미收米 아병이 74명 이었다. 안흥安興의 수군水軍이 15명, 병조兵曹 기병이 148명, 보병步兵이 24명이었다. 또한 금군禁軍 보인이 19명, 보충대補充隊 여정餘丁이 1명,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盧原驛의 보인이 5명, 금위영禁衛營의 보인이 13명,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포보砲保가 31명, 군향보軍餉保 7명, 어영청御營廳의 상번군上番軍이 33명, 자보資保가 35명, 작미보作米保가 70명이었다.
수어청守禦廳 소속의 군수軍需 아병 초관哨官이 1인, 기패관이 2인, 양아병良牙兵이 5명, 노아병 120명, 둔 기패관 2인, 둔 양아병 5명, 노아병 120명이었다. 또 사복시司僕寺 제원보諸員保 6명과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 7명, 균역청 선무군관選武軍官이 25인 있었다.
평택 소속의 군병 내역을 보면, 진위에 비해 군병의 수는 적지만 소속처가 상당히 많다.
충청도 특징으로 지방군인 속오군의 장교와 병졸의 내역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속대전』에는 홍주가 전영前營으로 되어있으나 『여지도서』에는 좌영左營으로 파악된다. 속오군의파총把摠은 속오군 편제의 하나인 사司의 장관으로, 사司는 초哨와 영의 사이에 있는 부대의 단위였다. 평택현의 속오군은 홍주 진관 즉 좌영(혹은 전영) 소속의 한 사司로서 편제돼 있었다. 그 밖에 중앙군 혹은 중앙 관부 소속의 각종 명색이 진위현보다 상세히 기록돼 있는 점이 평택현 『여지도서』 기록의 특색이다.



주석

1) 초(哨)란 속오법(束伍法)에 의한 부대 편제다. 11명이 1대(隊), 3대(隊)가 1기(旗), 3기(旗)가 1초(哨)로 구성됐고 5초(哨)가 1사(司), 5사(司)가 1영(營)을 구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1초의 병력은 모두 99명이지만, 지휘관과 그 밖의 각급 부대의 비전투원들을 포함하면 약 125명 정도가 1초를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