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 > 교육

본문 바로가기
교육>시대별 교육제도와 평택교육>근대 개화기>평택의 근대 교육기관>사립학교
■ 사립학교

본문

● 수성학교須成學校


1907년 수원군 북면 백봉리(청북면 백봉리)에서 참봉을 지낸 서상천이 당시 5천 원을 들여 학교를 세우고 인근 지역 청년들을 모아 신학문을 교육했다. 당시 교장은 서상천, 원장은 군수 이완용, 교감은 주사를 지낸 서상금이 맡아 53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 진흥의숙振興義塾


1907년 승지를 지낸 이범창과 참봉을 지낸 이범철 형제가 진위군 고덕면 율포리에 학교를 세웠다. 40∼50명의 학생을 모아 신학문을 교육했고 각 마을에 야학교를 세워 농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이때 이범철은 의연금을 모금해 흉년에는 빈민들을 구제하는 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범창은 흉년이 들면 빈민구제활동을 하고 ‘혜민회사惠民會社’를 차려 봄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보관하는 사창제도를 운영했다.

진흥의숙을 졸업한 대표적인 인물은 일제 강점기에 언론인·역사학자·항일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애국지사이자 미군정기 초대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선생이 있다.

 



| 고덕면 율포리에 진흥의숙을 세웠던 승지 이범창의 옛집 터(2011) |



● 진문소학교振文小學校


1907년 진위군수 김영진은 각 면에 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이북면 가곡리에 학교를 세웠다. 6개월 만에 학생이 56명으로 늘어 학교 시설이 부족하게 되자 이기찬 등 지역유지가 모금하여 반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이기찬·권동석 등 8명은 ‘유지회’ 모임을 조직하고 진문소학교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 동명의숙東明義塾


1907년 진사 김춘희가 진위군 병파면 조개터 최 모씨의 사랑채를 고쳐 학교를 시작하고 약 40명 학생들을 교육했다. 동명의숙은 보통과 2년제와 고등과를 두었고, 한문과 신학 문 외에 일본어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동명의숙 유지를 위해 의연금을 모금하기도 했는데 진위군수를 지낸 안성군수 김영진이 20원을 기부하고 진위군수 김복규도 적극 후원했다.
1909년 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됐다.
설립자 김춘희가 사망하고 학교가 폐교 지경에 이르자 숙장長 신석과 숙감塾監 박준국이 서울에서 이재영을 교사로 초빙하고 학교시설을 확충해 운영했다. ‘노동야학교’를 병설하고 학생 수가 늘어 주야간을 합해 80여 명이 됐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