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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삼국통일과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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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됐다. 건국 시기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빨랐지만 발전은 가장 느려서 법흥왕과 진흥왕을 지나면서 국력을 발전시켜 7세기에 전성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로부터 한강상류 지역을 빼앗고 다시 백제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한강하류지역과 평택지역을 포함하는 경기 남부를 차지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만들었다.

나제동맹이 깨지고 성왕이 전사한 뒤 백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중국의 당 세력을 끌어들이게 됐다. 660년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지금의 부여)이 신라와 당 나라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백제가 멸망했다. 신라와 당은 다시 북쪽의 고구려를 공격 해 668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신라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의 주인공이 됐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행정구역을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신라는 685년 9주를 설치했다. 9주는 통일 전 신라의 5주를 바탕으로 백제와 가야 지역에 4주를 설치했다. 새로 편입된 고구려의 옛 땅은 기존에 있었던 북방의 3주에 포함시킨 다음 명칭 만을 통일 전 북한산주北漢山州·우수주牛首州·실직주悉直州에서 각각 한주漢州(경기도 광 주)·수약주水若州(춘천)·하서주河西州(강릉)로 고쳤다. 주 밑에는 120개 군과 305개 현 이 있었다. 이 중에 주와 군은 몇 개의 현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렸다.

757년(경덕왕 16),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해 기존에 사용하던 토착적인 군현의 이 름을 한자식으로 바꾸는 개편-한화정책漢化政策-이 시행됐다. 지금의 평택은 신라 9주로 보자면 2개의 주에 나뉘어 속하게 된다.

한때 마한·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에 속했던 부산현은 9주 중 한주에 편입됐는데, 경 덕왕 16년 이후 진위현으로 명칭이 바뀌고 수성군水城郡(수원) 영현으로 편제됐다. 오랫동 안 백제 영역이었던 하팔현은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웅주熊州(공주)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덕왕 대에 하팔현이 탕정군湯井郡(온양)의 영현이 되었는데 탕정군이 웅주 에 속한 군현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화정책이 시행될 때 하팔현 이 팽성현彭城縣으로 개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평택지역 행정단위 호칭으로 쓰이 는 진위와 팽성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원래 양성에 속했던 영신지역은 영풍현으로, 용성지역은 차성현(또는 거성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성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양성지역은 적성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백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광덕지역에도 수성군의 영현으로 광덕현이 새로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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