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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이라고 하는 당항성은 현재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 기슭에 있는 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한다. 당항성은 삼국시대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5세기 후반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당성군으로 편제됐다. 이후 진흥왕 대에는 신라에 편입돼 당항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외교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덕왕 대에는 당은군이 됐다가 신라 하대 흥덕왕 대에는 당성진이 돼 군사적 거점으로서 역할을 계속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당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중국으로의 육로는 고구려에 의해, 해로는 백제에 의해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라는 당과의 외교 통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서해안의 항구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뜨리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하류와 당항성, 평택을 포함하는 경기남부 지역을 차지하려 했다. 백제 의자왕이 신라가 점령하고 있던 당항성을 공격하려 하자 신라가 바로 당에 구원을 요청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던 모습에서 신라가 당항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잘 알 수 있다.40)
신라와 중국의 교류는 대부분 서해안 항구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항성(또는 당은포)을 비롯해 충남 당진의 대진大津, 전북 옥구의 진포鎭浦, 전북 부안의 희안喜安, 전남 나주의 회진會津 등이 당시 서해 연안의 주요 항구였다. 신라는 이 중 당항성과 회진을 당나라와의 주요 교통로로 사용했다. 9세기 당에 건너가 동방대보살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던 낭혜화상朗慧和尙도 당항성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41) 당에서 신라로 건너올 때도 당항성이 이용됐다. 문무왕 8년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에 들어온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도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최종목적지인 당항성에 도착했다.42)
당시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는 당에서 신라 수도까지 가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등주登州를 출발해 요동반도 서남단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당항성에 상륙한 후 거기서부터 육로를 따라 700리를 가면 신라의 수도가 나온다는 기록이다.43) 화성 남양에서 경주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
지만 평택을 지나는 경로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평택-안성-충주-상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충주 이후로는 큰
산맥을 넘지 않기 때문에 이동에 상대
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많은 인물들
이 당과의 교류를 위해 이 길을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 원효대사가 해골물 마시는 불화 |
650년, 원효대사가 의상과 함께 당 으로 유학을 떠날 때 이들은 우선 육로 를 따라 고구려 영토를 지나 당으로 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 기 전이었으므로 이들은 간첩으로 오인 받아 요동에서 고구려 군에게 사로잡혔다. 간신히 돌아온 이들은 660년 다시 한 번 당으로의 유학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해로를 선택 했다. 그 여정 중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당에 가지 않고 신라에 남게 되었는데 해골에 고 인 물을 마시고 진리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 수도사 전경 |
포승읍 원정리 수도사修道寺는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오도성지悟道聖地라는 것이다. 당시 당으로 가는 신라인들의 교통로에 수도사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이 실제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성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평택지역은 드디어 전쟁의 긴장에서 벗어나게 됐다. 더구나 평택은 대당 교류의 창구인 당항성에 인접해 있어 육로나 해로로 당항성에 연결돼 있었다. 또한 화성 남양의 당항성과 평택지역은 이전부터 아산만을 통해 해로로 연결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항성을 통한 대중국 교류는 평택지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상우_국제대학교 강사)
[참고문헌]
『三國志』.
『後漢書』.
『新唐書』.
『三國遺事』.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朴燦圭, 『百濟의 馬韓征服過程 硏究』,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5.
『평택시 통합사』,평택시통합사편찬위원회, 2006.
주석
40) 『三國史記』 권 제5 新羅本紀 제5 善德王 11년
41)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42) 『三國史記』 권 제6 新羅本紀 제6 文武王 8년
43) 『新唐書』 제1부 권 제48 제33 下 地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