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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현은 백제·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신라·고려에 복속됐다. 고려 때는 수주水州(수
원)의 속현이었고 평택현은 천안부의 속현이었는데, 백제 때는 하팔현이라 했다. 속현이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현의 통치를 받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조직은 군현제도로서 주군현主郡縣이 있고, 주군·주현에 예속된 속군·속현, 그리고
그 아래에는 향·소·부곡이 있었다. 따라서 수주 등 대읍은 조세부과 및 역역力役 동원에
있어서 주읍의 이속吏屬들이 중앙에서 군현에 부과시킨 부담 중 많은 부분을 속읍에 할당
했다. 이에 속읍민들은 주군현의 과다한 부담을 이기지 못해 연이어 유망하게 되고 이 사
태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정부는 감무監務를 파견했다. 고려시대에서 최초로 감무 파견 기
록이 보이는 것은 1106년(예종 1)이다.47)
감무 파견은 유망민을 달래 토지에 안착시키고 주군현의 속군현민에 대한 침탈을 근절하
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다. 그러나 무신집권기인 명종 대에 감무가 파견된 것은 백성들의
수탈을 방지하기보다 쿠데타에 참여했던 하급 무인들에 대한 논공행상과 무신정권을 확립
하기 위한 지방통치권 확보가 더 큰 목적이었다. 그러나 목민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무인
들이 많이 임명돼 감무가 파견된 지역 주민들은 주군현의 억압보다 감무의 수탈을 더 근심
할 정도였다. 이것도 하나의 요인이 돼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진위현의
사정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진위현도 명종 대에 감무가 파견된 것으로 보아 정도의 차
이만 있을 뿐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대에 진위현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에는 현령이 파견됐다. 그렇다면 감무가 파견된 1172년(명종 2)에서 반란이 일어난 1217년(고종 4) 사이에 현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진위현은 고려시대에 수주의 속현으로 있다가 1172년에 비로소 감무가 파견될 정도로 작은 고을이었으나 3도의 요충지에 위치한 탓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따라서 진위현민은 조세·공부·역역의 부담 외에 사신 왕래로 인한 물자조달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사신이나 빈객의 행차가 있을 때 먹을 양식과 말먹이 등의 접대는 그 지역주민이 부담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위현은 호수는 221호이고 인구는 535명, 간전은 2,841결로 논과 밭이 반반이라고 하는데, 토지결수나(수원 19,154결, 안성 5,436결, 용인 5,988결) 인구수(수원 4,926명, 안성 1,763명, 용인 1,168명)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당시 진위현민은 전반적으로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위현의 토성은 이·김·최이며, 평택현의 토성은 이·임·박·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진위농민항쟁의 주모자인 이장대·이당필·김예 등은 모두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보인다.
주석
47) 『고려사』 권12, 세가 예종 원년 4월 병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