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현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 조선시대 >조선시대 지방통치와 평택 >조선시대 군현제와 평택 >진위현
■ 진위현

본문

조선시대 평택지역의 중심은 진위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태조 7년(1398) 경기좌도로 옮겨졌다. 8도제가 실시되고 경기좌·우도가 경기도로 개편되면서 진위현은 지금까지 경기도에 속하게 됐다. 진위현은 본래의 진위현에 영신현永新縣, 그리고 송장부곡松莊部曲과 천장부곡川莊部曲 등이 합쳐져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1424) 수원 관내의 송장 소속 87호(아마 송장부곡 전체가 아닌가 한다.), 부산釜山과 청호역靑好驛의 59호, 용인현龍仁縣과 의신현義信縣의 6호를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라 해 진위현에 붙였다. 그리고 1433년(세종 15)에는 수원부의 속현인 영신현을 진위에 붙였다. 그런데 천장부곡은 『실록』이나 『진위읍지』 등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이전에 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되기 전인 15세기 전반까지는 진위현의 대체적인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1799년(정조 23) 양성의 가천역加川驛을 진위현에 붙이자는 논의가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진위현 관할 지역은 계속 변화했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진위현을 다스리던 수령의 직급이 고정되지 않고 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종5품, 곧 현령으로 나타난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난戊申亂’ 때 진위현의 일부 사족이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법규에 따라 수령이 음관蔭官 출신의 6품을 맡는 것으로 현의 지위가 강등된다. 10년 뒤인 1738년 다시 종5품으로 복구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891년 『읍지』에는 현령이 없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의 직급이나 유무까지도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