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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학사의 고장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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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사 비각

| 홍학사 비각 |



왜란과 달리, 호란은 단기간에 제한된 지역에서만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평택지역은 직 접적인 전쟁 피해는 없었다. 다만 평택 출신 인물들이 밀접히 병자호란과 관계돼 있어 평 택도 전쟁과 항복의 영향을 받았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대치하던 중 청과의 화의 여부를 둘러싸고 견해가 대립했다. 청 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결사 항전을 주장하던 척화파斥和派로 나뉘어 있었다. 청나라는 끝까지 화의를 거절하던 세 명의 척화파 신하들을 청나라 로 끌고 가 심양瀋陽에서 참형斬刑에 처했다. 삼학사三學士라 불리는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가 바로 그들이다. 삼학사 가운데 두 명이 평택지역 출신인데 홍익한은 팽 성지역, 오달제는 송탄지역 출신이었다.

홍익한(1585〜1637)의 초명은 습으로 본관이 남양이다. 1615년 생원이 됐고 1621년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취소되고, 1624년 다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635년 장 령이 됐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으로 사신을 보내오자 청이 함부로 황제라고 한 죄를 물어 사신들의 목을 베자고 상소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쓸 수 없다면 자신의 머리를 내놓겠다고 했다.67)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장한 화의론和議論, 즉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반대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맥없이 항복하게 됐고 화친을 반대하던 척화파 신하들을 넘겨달라는 청의 주장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청이 홍익한을 데려갈 것을 예상해 그를 평양부서윤으로 임명해 놓았다. 화의론자였던 최명길은 자신이 홍익한과 한 집안이지만 그의 죄가 크기 때문에 붙잡아 청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에 서한을 보내 홍익한이 평양에 있으니 잡아가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68)



삼학사전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충절을 기록한 책-규장각소장)

| 삼학사전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충절을 기록한 책-규장각소장) |



홍익한은 결국 끌려가 처형당했는데, 처형 장소나 매장처가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해 평택 남서쪽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이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했다.)
오달제(1609∼1637)는 1627년 사마시에 합격, 163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이후 수찬에 이르렀다. 청을 배척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을 강력히 탄핵하다가 오히려 파직되기도 했다. 청이 척화파 신하들을 요구하자 오달제는 윤집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자수하고 스스로 잡혀가겠다고 청했다.69) 오달제가 윤집과 함께 청으로 가게되고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인조는 오달제의 노모와 처인 고령신씨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자신이 돌보겠다고 약속했다.70)

오달제는 심양에 잡혀가 청 황제에게 국문을 받게 된다. 황제는 그를 용서하고 처자를 데려와 같이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청은 그의 시체를 거두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처형당하러 끌려가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의 노모와 형에게 보냈는데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임금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71)


두 가족의 삶도 힘들었다. 홍익한의 두 아들과 사위는 병자호란 당시 적에게 죽었고 아 내와 며느리는 자결했다. 평택에 남은 노모와 어린 자녀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조정으로부 터 조금씩 도움을 받게 됐다.72) 오달제의 가족도 처와 유복자가 모두 역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됐다는 기록이 보인다.73)
홍익한과 오달제 모두 젊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당대의 수재들이었다. 하지 만 병자호란이라는 대사건 앞에서 순탄한 관직생활을 포기하고 이념에 목숨을 걸었다. 신 념을 위해 타국에서 목숨을 바쳤고 가족들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삼학사는 복권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 인정돼 이후 200년 간 조선에서 충 忠의 상징처럼 추앙받게 됐다. 후손들도 음직을 얻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평택지역은 삼학사 중 두 사람이 출생한 고장이다. 충忠과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의 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참고문헌]

『備邊司謄錄』

『承政院日記』

『練藜室記述』

『溫陽方氏大同譜』

『元陵君實記』

『朝鮮王朝實錄』

『擇里志』

『평택군지』, 1984.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유재성, 『한민족전쟁통사 Ⅲ-조선시대 전편』, 국방군사연구소, 1996.

이이화, 『국가 재건과 청의 침입』, 한길사, 2000.

이정일, 「원균론」 『역사학보』, 89권, 1981.

주석

67)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32 14년 2월 21일.

68)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34 15년 1월 23일.

69)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34 15년 1월 23일.

70)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34 15년 1월 29일.

71)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34 15년 4월 19일.
“孤臣義正心無怍, 聖主恩深死亦輕。 最是此生無限慟, 北堂虛負倚門情”.

72) 『朝鮮王朝實錄』 仁祖 권 41 18년 9월 16일.

73) 『朝鮮王朝實錄』 顯宗 권 19 12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