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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기는 조선후기 이래 가중돼 온 토지소유관계의 갈등과 신분제 해체현상이 심화되고 대내외적으로 위기국면이 조성됐다. 조선은 반봉건의 근대적 변혁뿐만 아니라 반외세 투쟁도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1876년 2월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는 근대적 외교관계의 성립을 의미하지만 조차지 설정, 연해측량 자유, 치외법권과 무역에 있어서 관리의 간섭을 배제하는 등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또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어 준 것으로 부산항·원산항·인천항이 차례로 개항하게 됐다.
이어 수호조규부록修好條規附錄과 통상장정通商章程 등이 체결됐다. 조선 내에서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 내 일본 거류민 통행거리(사방 10리) 설정, 일본 화폐유통 허용, 조선 화폐 일본 반출용인, 일본 선박 항세면제 등을 통해 본격적인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받게 됐다. 개항장 부근의 일본인 거류민은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은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배경으로 독점적인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게 됐다.
1882년 구식군인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문제로 시작된 임오군란壬午軍亂 후 체결된 제물포조약에서도 일본인 상권이 확대됐고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에서는 개항장 내 일본 거류민의 여행 범위를 사방 50리로 확장시켰다. 1년 뒤 다시 사방 100리로 확장하는 동시에, 양화진楊花津을 추가로 개항하고 일본 공사 수행원 등의 조선 국내 여행편의도 제공하게 됐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일본세력은 정치적으로 잠시 후퇴했지만 경제면 침투는 오히려 훨씬 더 심해졌다. 개항장에 조차지가 설정돼 일본인의 상업과 무역활동의 근거지가 됐으며, 일본 군함의 엄호 하에 개항되지 않은 항구의 해안지역에서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유출되는 주요 산물은 쌀·콩 등의 곡물과 인삼·소가죽 등이었고, 관세가 면세됐던 금金도 유출됐다. 금의 유출 액수는 기타 다른 산물의 총수출액을 능가할 정도였다. 조선으로 유입되는 주요 산물은 영국제 면직물을 비롯한 금속제품·잡화 등 가공품이
었다. 일본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을 일본과 중국에서 구입해 조선에 파는 중개무역을 하
면서 점차 이들 상품을 자국 제품으로 바꾸어 나갔다. 이에 조선은 점차 일본의 원료공급
지 및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 온 일본인들은 대개 무뢰한, 낭인浪人 또는 영세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개항
장에 개설된 일본제일은행 지점에서 금융지원을 받아 조선 농촌 깊숙이 직접 침투해 상행
위를 했다. 농민들이 면제품·농기구·냄비·솥·석유·물감·소금 등 각종 수입품을 사
들이기 위해 쌀을 팔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이용해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으로 수확을 갈취
해 갔다. 이것은 고리대적高利貸的 수단으로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이중의 이득을 취하는 상
행위였다.
또한 일본은 조선 연해에서의 어로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 어
민들은 1883년 통상장정의 어로협정에 따라서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 연해에 출어
할 수 있게 됐고 1888년에는 경기 연안에서도 어획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와 잠정
규칙을 약정했다. 1889년부터는 통어규칙通漁規則에 의해 극히 소액의 어로 면허세만 내면
4도 연해의 30리 이내에서 자유로이 어획을 할 수 있게 돼 일본 어민들은 울릉도와 제주
도까지 진출했다. 일본 어민의 조선 연해 어로침투는 조선 어민을 압박하게 돼 1891년에
는 제주도에서 일본 어민의 출어금지를 요구하는 민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조선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위협한 것은 다량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이었다. 1887
년 이후 대일 쌀 수출량은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해 1885년 9,800t이던 것이 1890년에는
374,600t으로 증가했다. 쌀 유출 증가로 조선 국내의 곡물가격이 갑자기 많이 오르고 면
직물·농기구·석유 등 각종 수입품인 생활필수품 가격 또한 상승했다. 가뭄으로 흉작까
지 겹치자 농민은 기근으로 허덕이는 처지에 놓이게 됐고 쌀 수출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
다. 조선은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것은 감사나 수령이 필요한 경우 쌀이나 콩
등이 다른 지방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명령권을 갖는 것이었다.
개항 이후 농촌사회는 지주층·부농층·빈농층·농업임노동층 등으로 구성됐으나 상품
화폐경제의 급속한 확산 및 봉건적 수탈은 많은 농민들을 몰락시켰다. 농민들은 세금을 내
고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값이 쌀 때에도 쌀을 내다 팔 수밖에 없었고 일본상인들의
입도선매 방식이나 매판 상인의 고리대적 수탈, 쌀 수출증대에 편승한 지방관들의 부정행
위에 시달려야 했다.
빈농층은 농민층에 광범한 하층세력을 형성했고 농업임노동자 처지로 몰락할 위험에 놓
여 있었다. 조선후기 이래 진행된 농민층 분화는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을 양산해 도시나
광산으로 유출시켰고, 많은 농업임노동층을 농촌사회에 퇴적시켰다.
농촌을 떠난 몰락농민들은 개항장·광산·철도부설 공사현장에서 노동자층을 형성했다. 몰락농민층은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취업을 위해 하와이와 일본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