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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의병의 모습 |
의병항쟁은 한때 유생층이 지도부를 이루었으나 동학농민운동과 더불어 농민이 주체가 된 무장 항쟁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적, 반외세적 성격이 강했지만 의병항쟁은 일제 침략에 대응한 반 침략적 성격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 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부르주아적 사회계층이 주도한 비무장 운동이었다.
의병항쟁은 그 시기와 성격에 따라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1차 을미의병(1895.10∼1896.10), 제2차 을사의병(1904.4∼1907.7), 제3차 정미의병(1907.8∼1910.8)이다.
을미의병은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에 이어 이듬해인 1895년 민비시해사건인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단발령斷髮令이 계기가 됐다. 제1차 의병항쟁에서 제천의 유인석 부대인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은 한때 충주를 함락하는 등 위세를 떨치며 전국 의병 봉기를 유발했다.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경기도 이천의 김하호金河鎬, 강릉의 민용호閔龍鎬,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안동의 권세연·김도화, 전라도 장성의 기우만, 평안도 의주의 조상학 등이 의병을 일으켜 주변 일대에 세력을 떨쳤다.
제2차 의병항쟁은 1904년 러일전쟁과 그 결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면서 일
어났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군사적인 압력으로 조선을 보호 하에 두고자 했다.
제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내정간섭을 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징발했다. 러
일전쟁 승리 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통감부를 설치해 통감
정치를 실시했다.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은 관료·유생들의 자결과 상소로 이어졌으며 애
국계몽운동 계열의 언론활동을 통한 반대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고종의 회유 조칙에 따라 거의 해산됐던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재차 봉기했다. 먼저 강원도
원주에서 원용팔이, 충청도 홍주에서 전참판 민종식이 봉기했다. 또 전라도 태안의 최익현,
경상도 영찬의 정상기, 영해의 신돌석, 죽산·안성의 박석려 등이 의병항쟁에 참여했다.
제3차 의병항쟁은 1907년 7월 군대 해산을 전후해 일어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로 한국 정부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이른바 고문정치로 거의 모든 내정을 빼앗겼다. 이에
고종은 이상주의적 판단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
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을 계기로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을 양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대의 제1연대 제1대 대장인 박승환 참
령이 권총으로 자결했다. 유서에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不惜”라고 자책하며 한국
군이 그대로 해산할 수 없다는 결의를 강력히 시사했다. 이후 의병 항일투쟁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