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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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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의 전신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에 보도한 국채보상운동

| 서울신문의 전신 대한매일신보가 1907년에 보도한 국채보상운동 |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통 감부 체제를 구축한 일본은 자국으로 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해 이를 식민지화 작업에 필요한 재원으로 사용했 다. 한국의 대일 부채는 1907년에 이 르러 1,300여 만 원이 됐고 이에 전 국 민의 단결된 힘으로 대일 부채를 상환 하고 일제의 침략 의도를 저지함으로 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전국적 으로 일어나게 됐다. 국채보상 움직임 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2월 중순 무렵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 박해령 등 16명이 발기해 공동 명의로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김광제 등은 대구에 국채지원금 수습 사무소를 설치 하고 취지서를 발표한 후 모금 활동에 들어가자 국민들이 반응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확 산됐다. 평택에서는 보통학교 교원 윤대선尹大善이 국채보상연의문國債報償演義文을 발표하 고 진위군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진위군율포의약사振威郡栗浦義約社에서 33환 10전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한 것을 시작으로 각 지역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진위군 이북면 구가곡에서 7환 70전, 일서면 내 리에서 12환 20전, 여방면 각 동에서 14환 60전, 주막리에서 13환 70전, 송장면 장안리· 가재동·이충동·동령리 등지에서 31환 27전, 병파면 합정리에서 20환, 일북 마산면 월경 리에서 17환 20전, 고두면 안화리에서 13환 20전 등 점차 각 동리에서 경쟁적으로 모금을 기탁했다.

한편, 마을 단위로 모금한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개인이 직접 의연하는 모습으로 확산돼 갔다. 지물포를 운영하는 김종호金鍾浩, 김종원金鍾元, 장윤식張潤植 등 3인은 100환을 기탁 했으며 진위군의 김원식金元植은 10환, 류진기柳珍基, 최병훈崔秉薰, 류낙기柳洛基 등은 각각 2환을 최세창崔世昌, 최영근崔英根, 한수창韓壽昌, 이점복李占卜, 안춘명安春明은 각각 50전 을 의연했다. 또한 이서면二西面 월암동月岩洞의 원후태元厚台는 3환 40전을 사동寺洞의 김두희金斗熙는 3환, 이병규李炳奎는 1환을 의연했다. 이러한 사례는 당시 향촌 중심의 사회 에서 국가 위기에 따른 개인의 사회적 참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밖에 평택읍 내면 상궁리上宮里, 남면 신성리, 동면 노도리, 진위군 신양리, 소길사면,서방면, 일암면 모산동, 오좌동, 서방면 신촌, 고두면 매방리, 율포리 주민들도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흐름은 1908년 1월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평택지역 국채보상운동 모금현황] 89)


읍면별 인원 모금액 비고
평택읍 116 111환 84전  
송탄읍 269 88환 85전  
팽성읍 73 25환 20전  
진위면 218 91환 20전  
서탄면 79 27환 80전  
고덕면 307 71환 55전  
오성면 208 89환 41전  
안중읍 111 32환 10전  
1,381 537환 95전  


평택 주민들의 참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평택이 서울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항일운동 소식이 신속하게 전달됐고 이로 인해 주민들의 항일 독립의식이 성숙된 것으로 보인다.
전 국민의 단합된 항일의지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이 운동을 방해해 지식인 계층을 분열시켰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운동을 통해 항일 국권회복 운동에 대한 전 국민의 기대와 열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항일 정신은 1910년 이후에도 민족 해방 운동으로 계승돼 갔다.



주석

89) 읍면별 명칭은 현재의 읍면으로 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