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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진농민조합 핵심인물 남상환의 활동 근거지였던 서정리역전(2011) |
노동조합의 결성과 평택지방의 노동운동
1910년 이전부터 조선 임금노동자들의 조직은 전국 각 지역에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돼 있었다. 1920년대 전까지 전국적인 유
대를 갖지 못하다가 1920년대 공장노
동자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전국적
인 규모의 노동단체가 필요하게 됐다.
1920년 2월 박종화를 중심으로 조선노
동공제회가 결성됐다. 조선노동공제회
는 이후 전국에 20여 개의 지회를 설
치하고 1만 5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
다. 『공제』라는 월간지를 발행해 노동
자들의 권익과 계몽에 앞장섰으며 노
동자들의 소비조합을 설립하고 노동쟁의 진상조사 및 중재 등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가 해체되고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됐다. 조선노동연맹회
는 노동자들만으로 조직된 직업별 노동조합과 지역적으로 조선노동공제회 명칭 하에 모인
연합노동조합들이 연합해 조직한 노동단체였고 조직이나 구성 형태 등이 조선노동공제회
보다 한층 더 발전된 단계에 있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직접적으
로 간여했고 5월 1일 노동절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20년대를 계기로 노동운동단체가 양적으로 증가하고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노
동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이 각 지역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통일적인
단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1924년 4월 17일 전국의 노동단체들은 조선노농총동
맹을 결성하고 조선노동연맹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이후 260여 개의 산하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은 당면 과업으로 노동문제의 해결을 내세우면
서 다음 강령을 채택했다.
첫째, 노동자·농민의 해방
둘째, 완전한 신사회의 건설
셋째, 자본가 계급과의 철저한 투쟁
넷째, 노동자·농민계급의 복리증진과 경제적 향상
1920년대 후반기에 사회운동의 방향전환론이 나타났다. 조선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분리돼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
총동맹으로 분리됐다. 조선노동총동맹은 1927년 9월 분리 당시 156개의 가맹단체와 2만
6백 명의 회원이 있었는데 1932년도에 가맹단체 56개, 회원 1만 8천 명으로 격감했다. 조선노동총동맹은 지역별·산업별 노동조합연합체를 결성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각 지방의 노동쟁의를 지도했다.
노동운동은 1930년대에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전환돼 갔다. 기존의 공업지역과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새로 발달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추진됐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각 공장이나 작업장에 3∼5명으로 공장반이나 직장그룹을 기초로 분회를 두었다. 분회 위에 공장위원회를 두었고 공장위원회 위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성립시킨 후 그것을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결성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하부조직으로 공장대표자회의·공장위원회·투쟁위원회·파업위원회 등을 두었다. 일제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체포·구금·고문·학살 등을 자행하자 노동운동은 지하로 잠적하게 됐다.
평택지방의 노동조합운동은 1930년대 『조선일보』 기사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1930년 7월 4일 평택노동청년회 상무 홍선유·김학룡 등이 노동조합 활동과 사회주의사상 선전을 이유로 검찰에 송국되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평택지방에서도 혁명적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활동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택지역의 농민운동
1920년대 경기도 지방의 항일독립운동에 있어 수원과 인천 등은 혈복단·국민단·건아단·조선개척사 등의 비밀결사운동과 신간회 및 근우회의 지회활동이 두드러졌고 평택·안성 등지에서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경기도 남부지역에서 농민·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던 것은 지리적으로 평야지대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925년 5월 17일자에는 ‘진위(현 평택)에서 발생한 기아참극’이라는 기사내용이 있다.90)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에 사는 김광운의 처 이씨는 32살 된 여자로 심한 기근에 시달리다가 다시 춘궁을 당하자 기근에 못 이겨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김광운은 원래 생계가 곤란한데 늙은 부모와 자녀 4명을 비롯해 그 밖에 다수의 가족이 있었다. 김광운의 가족은 작년의 기근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져 지난 12일부터는 야채를 뜯어 나흘 동안 생명을 유지했다. 5월 13일 오후 7시경 집안사람이 다 나간 틈을 타서 김광운의 처 이씨는 간수를 한 사발이나 마시고 그대로 부엌에 쓰러졌다. 이것을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 곧 방안에 안아다 뉘었으나 그대로 사망해 당시 주재소의 순사가 와서 검시하고 매장하게 했다. 두릉리는 전부 100여 호에 이 마을 사람만 40여 호가 되는데 근래 해마다 극빈자가 매우 많아 하루에 겨우 한 끼씩 먹고 연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농민들은 하루에 한 끼 정도 밖에 먹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민들은 대부분이 소작인이었다.
1923년 진위군 포승면 석정리에서는 지주가 소작인들이 추수한 곡식을 모두 빼앗은 사
건이 일어났다.
신풍리에 사는 이모 씨는 상당한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 고리대금을 했다. 그는 진위군 포승면 석정리에 사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돈을 빌린 사람이 갚지 못하자 그의 토지 40여 필지를 경매에 부쳐 그 토지를 차지했다. 원래 그 토지는 200석 밖에 추수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모 씨는 그 마을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소작을 주어 300석의 도지를 받도록 만들었다. 1923년 12월 9일 경 이모씨는 타작관 외 50여 명을 석정리에 보내 그 토지의 마름과 협력해 추수한 곡식을 전부 빼 앗았다. 그해는 흉년이라 추수한 곡식이 불과 300석 밖에 되지 않아 소작인들은 사정을 봐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정하는 소작인들을 밧줄로 결박하고 곡식을 모두 강탈해 소작인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91)
1926년 11월 진위군 동면과 송탄면의 소작인 대표인 김진태와 동리 황치호 외 7명은 당
시 평택경찰서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농감 김근수를 고소했다. 김근수가 고소됐던 이유는
첫째, 김근수는 진위군 고덕면 여염리에서 아무런 과실도 없는데 소작권을 임의로 이동시
키고 회사에서 도지賭地로 정해준 소작답을 병작해 갔다. 둘째, 규칙에도 없는 소작인 부
역을 강청했다. 셋째, 도지의 소작지가 한재나 수재를 당하면 회사로부터 면제나 감면을
받게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작료를 전부 받아갔다. 넷째,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는 소
작료를 가져오는 소작인에게 1석에 대해 15전씩의 수당을 주었는데 수당을 전부 횡령했
다. 다섯째, 김근수 임의대로 수확하라고 했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농감들의 횡포는
대단해 소작인들의 원성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92)
1931년에는 진위군 고덕면 문곡리에서 소작권 이동에 따른 소작쟁의도 있었다. 춘경기를
당해 경성에 사는 지주가 문곡리 부근에 소재한 300여 석 규모 소작권을 이동했기 때문이
었다. 매년 심한 수재로 인해 농작물의 실패가 많은 토지였다. 여기에 전 해에는 더욱 수
재의 피해가 심해 황무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작권을 이동했다. 이에 소작인들 사이에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게 돼 소작쟁의가 발생하
게 됐다.
1933년에 접어들어 경기도 당국에서는 지주로부터 소작지 관리를 위임받은 마름의 횡포가 심해져 소작쟁의가 자주 발생하자 악덕 마름에 대한 제재방침을 세웠다. 원래 마름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를 중개해 주는 역할이었으나 지위를 이용해 아무 죄도 없는 농민들을 압박해 부당한 요구를 했다.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소작인을 이동하는 등 해가 점점 심해졌다. 각 경찰서와 주재소에 마름들의 횡포를 조사하도록 했으나 마름들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33년 진위군에서 악덕 마름의 횡포에 대항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경성에 거주하는 지주 방승하의 토지 약 60여만 평을 관리하는 마름은 최종원이었다. 그는 때를 불문하고 자기의 소관사에 소작인을 불러 부역을 시키고 수확한 벼를 그의 집으로 가져가 타작을 시키는 등 무리한 고통을 주었다. 또 지주가 소작인에게 무이자로 주는 금비대 1,300원도 3분 이자의 고리를 첨부해 색조수수료라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징수했다. 마름 최종원이 횡포를 자행하자 150여 명의 소작인들은 단체행동으로 소작쟁의를 일으켜 대항했다. 소작인들은 진위군과 평택경찰서에 여러 번 진정해 겨우 색조수수료만을 다시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93)
1937년 지주의 무리한 소작료 가징수에 대해 반발한 소작쟁의도 일어났다. 경성에 사는 지주 이모씨가 규정된 소작료에 11할을 가징수해 물의를 일으켰다. 지주 이모씨의 부친은 1두락에 소두 8∼9두를 도조로 징수했으나 이모씨는 소작료를 2∼3배나 올려서 20∼22두까지 징수했다. 심지어는 어떤 소작인의 추수가 4두락에 모두 870∼880여 근에 불과했는데 900근을 납부케 해 20여 근이 부족한 일도 있었다. 소작료 3·7제도 무리한 형편이었으나 11할이나 징수한 것이다. 1934년 ‘농지령’이 발표된 이후 부당한 징수는 법적으로 용인이 안 됐기 때문에 진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94)
1938년 진위군 팽성면 암기농장岩崎農場(농장규모 논 8만 천 평)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중요쟁점 사항은 57명의 소작인들이 소작권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한 점이다. 공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이 공유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불하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주 이와사키岩崎政介로부터 소작료 납입 독촉을 받았다. 일제가 공유지를 일본인 이와사키에게 모두 불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소작인들은 소작료 납입 독촉을 거절하고 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해 소작쟁의를 일으켰다.95)
팽성면 이세규농장(농장규모 논 8만 평)에서도 63명의 소작인이 소작료 감액을 요구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소작인들은 소작계약 개정 결과 종래보다 고율의 소작료를 내야
될 형편이었으나 가뭄과 도열병으로 수확이 줄어들어 도저히 고율의 소작료를 낼 수가 없
으므로 소작료 감액을 요구했다. 이에 금년도 소작료를 내년에 납입하기로 타협하고 15일
간의 쟁의를 마쳤다고 한다.96)
한편 1930년 3월 박승극·남상환·장주문·이원섭·김영상 등이 중심이 돼 수원군과 진
위군을 묶어 혁명적 농민조합인 수진농민조합을 창립했다.97) 수진농민조합은 창립 이후
소작쟁의에 적극 개입해 이를 중재·해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 6월 진위군에서는 농회원이 심은 모를 뽑아버려 수진농민조합에서 엄중히 항의
한 사건이 발생했다. 매년 한재에 시달린 농촌에서는 하루가 바쁘게 이앙하는 때에 진위군
농회의 면리가 주재소 순사를 대동하고 청북면 어소리 방면에 출장을 나왔다. 면리는 주인
도 없는 논에 함부로 들어가 임의로 심어 놓은 모를 뽑아버렸다. 이 광경을 전씨 성을 가
진 과부가 목격해 면리와 과부 간에 시비가 벌어졌다. 전씨 성을 가진 이 여자는 본래 어
려운 살림으로 낮에는 남의 일을 다니며 어린 아들 형제와 그날그날의 생활을 해나갔다.
남의 소작답 3두락을 지난 15일 달밤에 아들 형제와 함께 밤을 새워가면서 논에 모를 심었
다. 그런데 면리가 이것을 몰인정하게 뽑아버리자 이 여인이 논둑을 두드리면서 대성통곡
을 하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게 했다.98)
또한 진위군 한산리에서 조병식의 처 지성녀池姓女(43세)가 아들 성환을 데리고 모를 심
고 있었다. 이때 군속이 역시 순사를 대동하고 논둑에 서서 부르자 그 여자는 무서운 마음
에 자기 아들더러 “이 자식아 왜 말대답을 못하느냐”라고 했다. 그 순간 지도원이 막무가
내로 논에 뛰어 들어와서 심은 모를 뽑아 던지며 “왜 욕을 하느냐”라고 하면서 폭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수진농민조합에 전해지자 쟁의부장 남상환이 그 진상을 조사해 군농회
장을 방문하고 엄중한 항의를 했다.99)
특히 1930년 10월 수원군 양감면에서 100여 명의 소작인들이 지주의 과다한 소작료 징
수에 항의해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이에 수진농민조합에서는 소작료 불납동맹을 지도해
지주를 굴복시키고 소작인들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 했다. 진위군 고덕면 문곡리 토지에
지주가 소작권을 이동해 일시에 생활대책이 막연해진 소작인들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수
진농민조합 쟁의부에서는 그 사실을 조사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1931년 11월 23일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 황구지 일대에 산재한 부재지주不在地主 경성 요시카와의 토지에 소속된 소작인 50여 명이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사음 사카모토의 집에 몰려와 불만 사항의 해결을 요구했다. 모두가 수진농민조합원들이었다. 이들 중 장주문·이원섭·홍건표·이종국 등 4명이 수원경찰서에 검거당하자 소작인 일동은 다음과 같은 3개 조건을 관철하기 전에는 절대로 타조打租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첫째, 채무를 본금으로 연부年賦로 지불하게 해 줄 것.
둘째, 사음 사카모토의 부당 착취를 감해 줄 것.
셋째, 종자를 매 두락에 일 두씩 지출해 줄 것.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이 있게되자 일제는 대량검거작전을 개시해 수진농민조합의 핵심인물인 남상환(25세, 모 신문 평택지국장), 김영상(25세, 모 신문 분국장), 장주문(농업), 이원섭(서당교원), 박승극(모 신문 수원지국장) 등 5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했다.100)
예심에서 이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죄목은 경찰의 간섭으로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지하운동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농민단체를 지도·조종하고 공산주의와 경제투쟁 사상을 고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성법원 합의부 공판에서는 전원 무죄로 석방됐다. 이것은 일제가 예심제도를 이용해 합법적 농민조합운동을 파괴하려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들을 1년 반 가량 미결수 상태로 구금함으로써 수진농민조합이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조선농민총동맹의 중앙 집행위원이었던 남상환은 미결수로 구금돼 있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수진농민조합 핵심 인물들의 검거로 평택·수원지역에서의 농민운동은 약화됐다. 이 사건 이후 진위군 평택면에서 노동협의회를 조직한 혐의로 청년 3명이 검거된 사건이 발생했다.
주석
90) 『조선일보』 1925년 5월 17일자.
91) 『동아일보』 1923년 12월 27일자 ;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 (상권) (평택시, 2001). p.510 ; 『경기도사』 경기도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638.
92) 『진위면지』 (평택시·평택시문화원, 1999), p.85 ;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510~511.
93) 『동아일보』 1933년 12월 4일자 ; 진위면지편찬위원회, 앞의 책, p.86.
94) 『동아일보』 1937년 11월 4일자 ;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511~512.
95) 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의 朝鮮治安狀況』昭和 13年(巖南堂書店,1966), p.100.
96) 朝鮮總督府 警務局, 앞의 책, p.87.
97) 진위면지편찬위원회, 앞의 책, p.87.
98) 『조선일보』 1930년 6월 23일자 ;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512~513.
99) 『조선일보』 1930년 6월 23일자 ;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512~513.
100) 『동아일보』 1931년 1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