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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복동은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이다. 통복천의 갯가에 위치해 ‘통복개’라고 했고, 보洑를 쌓아서 ‘통복보’라고도 불렀다. 1914년 신덕·화촌·고평을 통합해 통복리라고 했 다. 그 뒤 철도건널목(땡땡거리, 현 통복지하도) 동쪽 삼거리(현 시장로터리) 부근에 민가 가 형성되면서 마을이 확대됐고, 일제 후반 낙촌 부근에 일본인 과수농가 20여 호가 정착 했다. 또 통복시장 그릇전 부근에 일본인들만 다녔던 평택심상소학교가 설립되고, 현재 세 무서가 있는 곳에 평택공립보통학교(현 성동초등학교)가 자리를 잡았다. 천주교인들이 옹 기를 굽던 낙촌도 통복동에 편입되면서 현재와 비슷한 영역을 갖게 됐다.
통복동의 가장 큰 변화는 한국전쟁 뒤에 나타났다. 유엔군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원평동의 평택시장이 1953∼1956년 사이 일본인 과수원 자리로 이전해 통복시장이 되자 통복동은 평택지역 전통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또 평택지구대 뒤편에 우시장이 형성됐으며, 시장 주변에 농협·기업은행·우리은행과 같은 금융기관과 여관·목욕탕 등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동네와 인구가 자리 잡으면서 도시가 확대됐다. 1970∼80년대를 전후해 우시장이 문을 닫고 우시장 터와 현재 평택제일감리교회 일대가 택지로 개발됐다. 1994년 동아국화아파트, 1995년 신명보람아파트의 입주는 통복동의 세대수와 인구를 크게 증가시켰다.
통복동의 전체 면적은 0.36㎢다. 인구는 2,420세대, 5,044명(남자 2,556명, 여자 2,488명)이다. 1986년 11통으로 출발했다가 조정돼 11통 54반으로 편성됐다. 철길 서쪽지역은 원평동 관내에 포함됐고, 통복동사무소가 관할하는 지역은 철로 동쪽지역이다. 평택세무서·평택지구대(구 성북파출소)와 같은 관공서와 기업은행·우리은행·농협중앙회·평택농협·평택축산농협·평택원예농협·새마을금고·농협창고 등 금융기관 8개소가 밀집됐고, 중앙병원을 비롯해 크고 작은 병원과 의료원 21개소·평택감리교회 등 다양한 종교시설이 있다. 현재는 재래상업과 함께 유흥업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과거 시장로터리를 중심으로 국도 1호선과 38호선, 45호선이 교차했던 교통의 중심축이다.
| 아케이드 공사로 새 단장한 통복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