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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기리內基里35)
내기리는 포승읍의 면소재지다. 포승읍사무소·농협·우체국·보건소·초등학교·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승량동면으로 읍치邑治에서 무려 1백 리 가까이 떨어진 지역이었다. 1895년과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 포내면이 됐고, 1914년 진위군에 통합됐다.
내기리의 중심마을은 ‘안터’다. 안터는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이웃한 희곡리·방림리와 함께 함평이씨의 6백 년 세거지다. 내기內基는 ‘안터’의 한자 표현이다. 안터 서남쪽은 새말이고, 북동쪽에는 새터말이다. 새터말 안쪽은 속말이다. 속말에는 이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이씨촌’으로도 불렸다. 속말 옆 마을은 ‘고잔’이다. 고잔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기에 곶串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정문동 남쪽 마을은 능모루다. 능모루는 이대원 장군의 묘 옆 산마루에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됐다. 도안都安은 ‘돌안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안터 동남쪽에는 승학동이 있다. 승학동은 지형이 ‘학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정문동은 이대원 장군의 충절정문이 세워졌던 마을이다. 음동은 본래 ‘은굴’이다. 승배산 아래의 작은 마을은 ‘잿말’ 또는 ‘재촌’이다. 승배산은 광덕사(심복사)의 중이 암자를 짓고 수행을 했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으로 내기리의 당산堂山이었다.
내기리 함평이씨는 평택 서부지역의 대표적 명문가다. 조선시대에 여러 관직자가 나왔고 지금도 국회의원·장관·도의원·시의원 등 많은 정치인·기업인을 배출하고 있다.
함평이씨가 포승읍으로 이거한 것은 여말선초다. 입향조는 사제감정을 지낸 이중길이다. 이중길은 조선 초 건국에 반대해 낙향했다고 전한다. 함평이씨 가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정해왜변(1587)에서 순절한 충렬공 이대원이다.
이대원 장군 묘는 정문동 서쪽 소대덕산 산록에 있는데, 전란 중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어 죽기 전에 하인에게 남겨 전해온 속적삼으로 가묘를 조성했다. 사당 확충사는 죽은 뒤 건립한 것인데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1668년 복원했으며 1978년 중건했다. 사당에는 위패와 함께 영정과 해전도 그리고 정문동에 세웠던 충신정려도 함께 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손자 이석의 건의로 건립됐으며, 비문碑文은 소론의 영수 남구만이 찬撰했고 조상우가 썼으며 김진규가 전액篆額했다.
주석
35) 함평이씨 대종회, 2010년 3회에 걸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