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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남리鳳南里44)
진위振威의 백제시대 지명은 연달부곡·송촌활달·금산이었다. 5세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점령한 뒤 부산釜山으로 바뀌었고, 통일 후 신라 경덕왕(757) 때 행정구역명을 개편하면서 진위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봉남리는 무봉산의 남쪽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봉남리라는 지명이 없었다. 진위현 읍내면邑內面에 주막·만촌·서문·옥거리·아곡·신당골·교촌과 같은 작은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갑오개혁과 이듬해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군이 출범하면서 ‘군내면’으로 불리게 됐다. 1914년 7개 자연마을을 하나로 해서 봉남리라 했다.
일제강점기 봉남리에는 진위군청과 헌병대가 있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지역주민들의 공격목표가 됐다. 하지만 철도교통과 근대도로교통에서 소외되면서 점차 쇠락했고, 진위군청이 평택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평택지역의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잃었다. 인구는 현재 약 6백여 명쯤 된다. 해방 전후만 해도 4백 명쯤이어서 완만한 성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은 1914년 이전에는 7개였지만 현재는 동부(1리)·서부(2리)·아곡(3리)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서부마을에는 주막거리·만촌·신당골이 있다. 삼남대로의 초입이었던 주막거리는 현재 진위초등학교 정문 남쪽으로 해방 직후 3개의 주막과 ‘봉남리장’이라는 장시場市가 열렸다. 봉남리장은 일제강점이전에 없어졌다가 해방 직후 다시 열렸는데 사람이 모이지 않아 다시 폐장됐다고 한다. 신당골은 마을 북쪽 원각사라는 암자가 있는 계곡이다. 동부마을에는 옥거리가 있다. 옥거리는 동부東部라는 지명 이전 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기존의 향토지에는 옥거리가 일제강점기 진위군의 감옥이 있던 곳이라고 해석을 했지만 1914년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봐서 조선시대 진위현의 감옥으로 보인다. 아곡은 관아의 뒤쪽이어서 본래 마을이 없었다. 영조 때 이세필이라는 인물이 낙향해 마을을 일구었다. 50∼60년 전만 해도 2∼3호에 불과해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한국전쟁 뒤 여러 세대가 이주하고 최근에는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제법 큰 규모가 됐다. 교촌校村이라고도 부르는 향교말은 진위향교 앞 2~3호의 작은 마을이다. 본래 이곳은 향교와 관련된 요역을 담당하던 마을이었다.
지금 봉남리는 진위면소재지로 면사무소와 진위초등학교, 농협 등 공공시설이 집중돼 있다. 농업인구도 있지만 상업인구와 공무원, 회사원도 많다. 진위면에는 진위일반산업단지를 비롯해 대단위 공장지대 건설이 추진되고 있지만 봉남리는 포함되어 있지않아 당분간 현재와 같은 경관과 삶의 모습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 전원주택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봉남3리 아곡(2012) |
주석
44) 황언년(82세) 외 봉남리 노인들, 2007년 1월 봉남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