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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곡리佳谷里45)
가곡리는 조선후기 진위군 이북면 지역이었다. 이북면은 구가곡·신가곡·신북·후북·하북·신리·산직촌·견산 등 8개 마을을 관할했는데, 1914년 가곡리·견산리·하북리로 통합됐다. 가곡리는 통합 과정에서 구가곡·신가곡·신북·후북을 아우르게 됐고 나중에 당월마을이 형성되면서 모두 5개 자연마을로 편제됐다.
가곡1리는 ‘신가곡’이다. 신가곡은 경주이씨 상서공파의 사패지였다. 상서공파는 선조 때 이항복 이후 크게 성장하는데, 신가곡은 이항복의 현손인 이정좌의 후손들이 세거했다. 이정좌의 후손 가운데는 순조·철종 연간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계조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유명하다. 이유원은 후손이 없어 6촌 간인 이유승의 둘째 이석영을 양자로 들여 재산을 상속했다. 1910년 이회영을 비롯한 이유승의 6형제와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이거할 때 이석영이 상속받은 신가곡 일대의 땅도 제주고씨에게 매각됐다. 지금도 마을 안에 경주이씨 재실, 이정좌·이계조의 묘와 재실이 있고, 신가곡 입구에는 ‘경주이씨천’이라는 표석이 있다. 경주이씨로부터 재산을 매입해 경제력을 갖게된 제주고씨는 근대 이후 북면(진위면) 면장·군인 등을 배출해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쳤다. 현재 신가곡은 제주고씨가 많으며, 논농사와 함께 과수농업이 발달했다.
가곡2리 ‘가야실’은 30여 호로 가곡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의 대표지명인 가야실은 구가곡·가실·계실·개실·계시루·가오실로도 불린다. 가야실은 안동권씨가 대성이며 안성이씨도 많다. 안동권씨는 권휴가 용인시 남사면에서 이주한 뒤 18대 약 600여년을 살았다. 600여 년을 거주하며 후북(뒷성지)까지 세력을 넓히며 영향력을 확대했으나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큰 타격을 입었고 해방 전후에는 전염병으로 큰 화를 입어 위세가 약화됐다.
가곡3리는 ‘신북’이다. 신북은 응달말·건넌말 등으로 불려진다. 50호 가까이 되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30호가 채 안 되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성씨는 순흥안씨, 제주양씨, 청풍김씨가 대성이지만 주도적이지는 않다. 가곡4리는 ‘후북’으로 일반적으로 ‘성뒤’ 또는 ‘뒷성’이라고 불리며 응달말의 반대편에 있다고 해 양달말이라고도 한다. 약 40호가 거주하는데 대부분 안동권씨다. 후북의 안동권씨는 가야실을 개척한 권휴의 둘째 아들 권발이 개척한 이후 560여 년을 살아왔다. 가곡5리 ‘당월’은 신북마을 뒤 당집 너머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 ‘당너머’다. 이곳에는 1914년 전까지는 마을이 없었고 해방 후에도 14∼15호 수준이었다. 행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마을의 대소사도 신북마을과 같이 했고 성씨도 양씨·박씨·정씨 등 다양하다.
주석
45) 권병우(74세), 권오인(63세), 권칠득(68세), 권혁보(75세), 2006년 5월 가곡1, 2리에서 인터뷰
이창우(82세), 전 농림부 차관, 경주 이씨 상서공파 후손, 2004년, 2006년 전화로 인터뷰
고수웅(70세), 2011년 2월 가곡1리 고수웅씨 자택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