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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부터 도구를 제작한 인간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그 이후에는 농경생활을 하기 위해서 도구를 제작 했다. 도구들은 점차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에 적합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고 시대 흐름에 따라 기술의 발전을 지속 해왔다. 청동기시대부터 전문적인 장인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수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공장工匠, 공인工人, 수 공업자手工業者, 장공인匠工人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정치 질서 및 경제관 때문에 농민을 중시하고, 공장과 상인은 말업末業에 종사한다고 인식돼 천하게 생각했다.
| 조선시대 대장간(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
고대사회의 수공업은 관영(관청)수공업과 민영(가내)수공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관영수공업은 관청과 지배계층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는 것이며 민영수공업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조세를 납부하기 위해 제조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수공업 형태도 국가 관청의 주도하에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수공업과 가내수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농기구, 생활용품들의 제작으로 분류할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공조工曹는 교량, 도로의 개설과 도량형기 제작, 보물의 관리, 장공인의 관리를 했고, 지방에도 공장工匠을 두어 공산품과 기계류 등을 만들게 했다.
조선시대 장인들은 중앙관아에 소속된 경공장과 지방 군현에 소속된 외공장으로 구분했다. 외공장은 갑장甲匠(갑옷 제작), 야장冶匠(대장장이), 궁인弓人(활 제작), 시인矢人(화살
제작), 목장木匠(목수), 피장皮匠(가죽 가공), 유장鍮匠(놋쇠 가공), 칠장漆欌(옷칠), 사기장沙器匠(사기 제작), 궁현장弓弦匠(활시위 제작), 지장紙匠(종이 제조), 석장席匠(돗자리 제작), 조각장雕刻匠(조각 담당), 마조장磨造匠(맷돌 제작), 묵장墨匠(먹 제조), 소성장梳省匠(빗 제작), 유구장油具匠(기름 먹이는 공장), 황옹장黃瓮匠(항아리 제작), 선자장扇子匠(부채 제작), 석장石匠(석수), 종모아장鬃帽兒匠(상투 제작)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성에 야장 1명, 시인 1명, 목장 1명이 배속돼 있었다. 진위현에도 야장 1명, 시인 1명, 목장 1명이 있었다. 평택현에는 유구장 2명, 야장 1명, 시인 1명, 지방 2명, 석장 1명, 목장, 1명, 칠장 1명이 소속돼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송탄 지역에는 대장간과 야철소가 있었다. 또한 송탄 지역은 참나무가 숲을 이루어 숯막이 많았으며, 질이 좋아 궁중에 납품되기도 했다. 탄현은 옛날 숯을 싣고 넘어갔던 숯고개라는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장시場市가 전국적으로 증가했다. 진위에도 읍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수공업품이 활발하게 거래됐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요역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고용제로 바뀌게 되고 민간 상업자본이 공장에 투자되면서 관영수공업은 점차 쇠퇴하고 민영수공업이 주도를 하게 됐다.
근대에 수공업 부문에서 장인들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변화돼 시설을 갖추고 원자재를 구입하는 한편, 일정한 임금을 지불하는 노동자를 고용
해 분업에 의한 제품 생산방법이 나타났다. 상인이 공장에게 미리 물품 값을 지불해 주문 제작하는 방식인 선대제수공업도 발생하고 공업에서도 자본주의 모습이 보이다가 개항을
계기로 열강들의 자본과 상품이 들어오자 자본과 규모 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국내 수공업자들은 몰락하게 됐다.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국내 자본
에 의한 공업 발전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