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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업 형태는 국가관리 관청이 주문하는 공산품 제조와 개인가내수공업 형태로 만들어졌던 생활용품이었다. 평택지역에서는 진위현이나 평택현 등 관아 소재지였던 진위현 봉남리와 팽성읍 객사리 등에 병기나 농기구를 제작하는 대장간이 있었고 그 외에 가내수공업이었다. 『경국대전』에 지방관청의 장공인들 중 진위현과 평택현에 배치된 장공인들은 종이제조 장인 등 모두 13명이었다. 이들 외에 같이 작업을 하던 장인도 있었을 것이다. 읍치인 객사리에 병기나 농기구를 제작하는 대규모 대장간이 있었고 그 외 물품들은 가내수공업 형태로 기능인들이 직접 제작하는 수공업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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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기 동안 일본인이 동력을 사용하는 공장들을 세우자 평택지역도 가내 수공업 차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농기구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철공소와 도정공장 정도였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 공업용수 이용이 용이한 진위천과 오산천 주변에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통계연보에 1961년 12월 31일 평택군 전체 인구 155,329명 가운
데 제조업 종사자는 10개 읍면(평택읍 196명, 송탄면 183명, 현덕면 27명, 오성면 20명, 고덕면과 팽성면이 각 7명씩, 포승면 6명, 청북면 3명, 서탄면 2명, 진위면 1명)에 452명
(0.3%: 남자 341명, 여자 111명)으로 기록돼 당시 제조업은 가내수공업 수준을 벗어나지못한 상태로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았다.
2000년 말 공장 등록업체가 714개 업체로 대폭 증가했는데, 경제여건 호전의 결과라 할수 있다. 1984년 발간된 평택군지에는 1981년도 평택상공회의소 자료에 나타난 생산기업체
수 57개소와 비교할 때 20년 사이에 약 11배로 증가했다. 평택시 통계는 2013년 9월 30일 현재 평택시 제조업체수는 1,807개사이고 근로자수는 70,20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