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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대의 군현제 정비와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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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시대 10도제는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소멸했다. 주현제도 실패했다. 부·군의 읍호가 부활되고 있으며 일부 외관이 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1005년(목종 8) 12절도사·4도호부사·동서북계방어진사·현령·진장鎭將 등만 남기고 관찰사·도단련사·단련사·자사 등은 폐지했다. 수주나 환주에 파견됐던 도단련사도 폐지됐다.

1002년(현종 3) 12절도사마저 폐지되고 대신 5도호都護·75도안무사道按撫使가 설치됐다. 5도호는 안북도호부 영주寧州(평안남도 안주)·안남도호부 낭주朗州(전라남도 영암)·안변도호부 화주和州(함경남도 영흥)·안서도호부 풍주豊州(황해도 풍천)·안동도호부 상주 등이었다.

75도 안무사는 75명의 안무사가 파견된 것이 아니라 7개 지역에 파견된 안무사로 하여금 75개 지역을 관할하게 했다. 안무사가 파견된 지역은 양주·광주·충주·청주·진주·길주·황주 등이었다. 이에 따라 진위현은 양주안무사의 통제를 받게 됐고 평택현은 청주안무사의 통제를 받게 됐다.

고려의 군현제는 현종 9년(1018) 다시 개편됐다. 현종 3년의 안무사제가 폐지되고 각지에 많은 외관이 파견됐다. 전국에 4도호道護·8목·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이 설치됐다.

4도호는 안남도호부 전주·안서도호부 해주·안변도호부 등주登州·안북도호부 영주寧州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들이 대개 현종 9년에 새로 설치된 것으로 돼있다. 즉 안북도호부는 이동 없이 예전 지역에 그대로 설치됐지만 안남도호부는 영암에서, 안서도호부는 풍주豊州에서, 안변도호부도 화주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현종 5년 이후 그대로 존치된 안 동도호부 경주까지 하면 실제는 5도호부가 된다. 현종 13년 안남도호부가 다시 전주로 환 원됨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4도호부가 됐다. 현종 21년 안동도호부마저 다시 동경이 됨으 로써 3도호부만 남게 됐다.

8목도 실제 『고려사』 지리지에 등재돼 있는 목의 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종 9년 목 이 설치됐다고 나오는 지역은 광주목·충주목·청주목·진주목·상주목·나주목 ·황주 목 등 7개 지역이고, 나머지 1개 지역 전주목은 사실상 현종 13년에 목이 됐다.44)

56지주군사는 『고려사』 지리지의 실제 기록과 더욱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때 지주사 가 설치됐다고 나오는 군현은 양주楊州·수주樹州·수주水州·원주·공주·길주·동주·평주平州 등 8곳이고, 곡주谷州의 경우는 군을 칭한 적이 없는데 지군사가 설치됐다고 되어있다. 아마 지주사의 잘못이라 생각되므로 9개 지역이 된다. 지군사가 설치된 지역은 밀성군密城郡 1곳뿐이다. 지부사도 지주사와 동격인데 지부사 설치 지역은 천안부天安府· 경산부京山府 2곳이다. 그리고 진장鎭將이 설치된 지역은 백령진白翎鎭이 확인된다. 『고려사』 지리지에 현종 9년 현령이 설치된 개성현開城縣·장단현長湍縣·강화현江華縣· 가림현嘉林縣·남해현南海縣·거제현巨濟縣·옹진현瓮津縣·진명현鎭溟縣·익령현翼嶺縣·삼척현三陟縣 등 10곳이다. 이밖에 ‘후’에 현령이 설치됐다고 나오는 진도현珍島縣·수안현 遂安縣·해양현海陽縣 등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 ‘고려’, ‘고려초’의 시기에 현령 이 설치된 것으로 나오는 임피현臨陂縣·진례현進禮縣·금양현金壤縣·고성현高城縣·간성현杆城縣·울진현蔚珍縣 등도 이 범주에 들 가능성이 있다.

현종 9년에 4도호·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 등이 설치됐다는 기록은 대체적 으로 믿을 만하다. 실제 『고려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외관 설치 지역과 정확하게 일치하 지 않는 것은 지리지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치조직 정비에 따라 평택지역도 외관의 통제를 받게 됐다. 즉 진위현이 속했던 수주에는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됐고 평택현이 속해 있던 천안지역은 환주에서 천안부로 다 시 복귀돼 지부사知府事가 파견됐다. 이들은 또한 그보다 상위기구인 목의 통제를 받았다.
수주는 광주목의 통제를 받고, 천안부는 청주목의 통제를 받았다.

외관이 파견된 주군현이 정해지면서 여기에 속하게 될 속군현도 대폭 정리됐다. 원래 통 일신라시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군현에 외관이 파견돼 있었다. 즉 주에는 도독都督,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현령縣令이 설치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국에 도독은 9인, 태수는 115인, 그리고 소수少守 85인, 현령 201인이 있었다. 주 밑에 몇 개의 군이 있었고, 군 밑에 몇 개의 현이 영속領屬돼 있었다. 도독이 그 휘하의 태수를 통솔하고 태수가 그 휘하의 현령을 통솔함으로써 지방통치체제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영현領縣’이라 표현하고 있다.45)

신라하대에 정치기강 해이와 농민봉기에 의해 외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됐다. 외관이 파견된 지역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속군현屬郡縣이 발생했다. 즉 외관이 속군현의 향리들을 통제하는 형태가 시작됐다. 이를 『고려사』에서는 ‘속군屬郡’·‘속현屬縣’ 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속군현의 발생과 정리는 고려 태조 때에 많이 진행됐으나 왕권이 불안정하고 지방 세력이 강했던 당시에는 이를 다 정리할 수 없었고 현종 9년에 정리할 수 있었다. 양광도 양주楊州의 경우 고려 초에는 하나의 속현도 갖고 있지 못하다가 현종 9년에 이르러 견주·포주 ·행주·봉성현·고봉현·심악현·풍양현·사천현 등 8개의 속군현을 갖게 됨으로써 막강한 읍세를 자랑하게 됐다. 경상도 안동부의 경우 14개의 군현이 내속內屬됐다.
평택지역도 이러한 군현제 변화의 영향을 받아 진위현이 속해있던 수주에도 새로 많은 군현이 내속됐다. 현종 5년 양성현陽城縣이 내속됐고, 9년에는 당성군唐城郡·안산군安山郡을 비롯해 안성현安城縣·영신현永新縣·쌍부현雙埠縣·용성현龍城縣·정송현貞松縣·재양현載陽縣이 속하게 됐다. 쌍부현은 예전에 육포六浦라 불리다가 현이 됐다. 정송현은 본래 송산부곡松山部曲이었으나 승격해 현이 됐다.

천안부의 경우도 새로이 온수군溫水郡·인주仁州·신창현新昌縣·풍세현豊歲縣·예산현禮山縣·직산현稷山縣·청양현靑陽縣 등이 속군현으로 들어오게 됐다. 천안부는 종래의 평택군을 합해 총 8개의 속군현을 거느리게 됐다.
현종 9년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책이 수립돼 향리들의 정원이 정해졌다. 군현의 대소를 정의 다과에 두고 향리들의 수를 정했다. 정이란 장정을 지칭한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전국의 군현을 남방과 북방으로 나누어 정의 수에 따라 위로는 호장戶長에서부터 아래로는 사옥사司獄史에 이르기까지 정원을 규정하고 있다.

향리들에 대한 공복公服도 정해졌다. 주·부·군·현의 호장은 자삼紫衫을 입었고 부호장 이하 병정·창정 이상은 비삼緋衫, 호정 이하 사옥부정司獄副正 이상은 녹삼綠衫을 입도록 했다. 이들은 모두 가죽신을 신고 홀笏을 들 수 있었다. 사와 병사·창사·제단사諸檀史는 각각 심청삼深靑衫과 천벽삼天碧衫을 입었으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홀도 들 수 없 었다.

한편 외관의 권한을 대폭 증대시켰다. 외관으로 하여금 향리들의 능부能否를 감찰하도록 했으며 호장을 중앙에 추천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됐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평택지역의 각 군·현에도 향리들이 배치됐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평택지역 각 군현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어 향리들의 숫자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이들 평택지역의 군·현은 속현이었으므 로 주읍에 해당하는 수주와 천안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평택지역 향리들은 5일에 한번 씩 수주나 천안부에 나아가 외관의 명령을 전달받아야 했다.

외관뿐 아니라 주읍의 향리들에게도 통제를 받았다. 주읍의 향리가 오면 수탈도 당했고 피해는 결국 지역의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외관들이 가끔씩 봄에 속군 ·현을 돌아보 는 제도를 ‘춘행春行’이라 했다. 본래 목적은 권농과 구휼이었으나 속읍에서는 접대하느라 많은 재물을 소비하게 됐다. 또 주읍의 축성이나 토목 공사 등에 속읍의 백성들이 동원되 기도 했다.
평택지역의 각 군·현은 속현이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주읍의 수탈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
무신집권시대 때 진위현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주석

44)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주목은 현종 9년 안남도호부가 됐다가 현종 13년 단순히 전주로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전주목이 된 기록이 없으므로 이때 전주목이 됐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8목도 결국에는 현종 13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45) 『고려사』 지리지에서도 외관과 외관과의 영속관계는 ‘영도호부領都護府’·‘영군領郡’·‘영현領縣’ 등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