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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불교유적>약사사藥師寺>현황 및 내력
■ 현황 및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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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안중 39번 도로에서 수원쪽으로 가다가 용성리 설창 마을을 지나 350m쯤 가면 약사사가 있다. 약사사는 대웅전과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요사 등을 갖춘 비교적 작은 규모다.6)
1998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조사했을때 조선후기에 제작된 부도가 확인됐고 기와류, 자기류 등 조선시대로 간주되는 다수의 유물이 수습됐다. 약사사 맞은편 계곡은 ‘절앞 골’, 뒤로는 ‘절뒤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약사사가 언제 창건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까지 유지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약사사가 한국전쟁 때 소실된 이후 1971년 안태영 주지가 옛 절터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2년 후불탱화를 비롯해 관음 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산신탱화를 봉안했으며 1973년에 요사와 선실을 짓고 대웅전 단청을 마쳤다. 대웅전 동쪽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불신佛身 4.5m, 총 10m 높 이로 1986년에 조성되기 시작해 1987년 4월에 완성됐다.
이곳에 미륵보살을 봉안하게 된 이유는 이 절의 위치가 아산만과 가까워 예부터 왜적의 노략질이 심했으나 미륵불상이 서 있는 주위 100리에는 왜적이 얼씬도 못했다는 구전에 따라 조성된 것이라 한다.



| 약사사 부도 |



주석

6) 기록도 거의 없고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만한 유물이 수습된 것도 아닌데 842년 혹은 864년에 신라의 염거 화상(廉居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염거화상은 844년에 입적했으므로 그가 이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재는 약사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 927년(태조 10) 해일대사(海日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나, 해일대사는 생몰연대가 1541년~1609년이므로 이 또한 사실에 부합된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