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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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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재동佳材洞117)


가재동은 조선후기 진위현 송장면 지역이다. 1914년 송장면 가재동·소고니면 가재동·시동柿洞·여방면 방혜동·중리·사당재리·막곡리幕谷里를 합쳐서 가재리라고 했다. 1981년에는 송탄시에 속했고, 1995년 평택시 동부동 관할이 됐다가 현재는 송탄동의 관할지역이다. 가재동은 송탄동의 중심마을로 송탄동주민센터와 송탄초등학교도 이 마을에 있다.


가재동에는 막곡·중리·방혜동·상가재·하가재와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막곡은 송탄동주민센터·송탄초등학교·우림필유아파트가 있는 마을이다. 막곡幕谷은 ‘늠말’ 또는 ‘막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뒤 ‘성재산’이 군막軍幕을 친 모양과 같다 해서 유래됐다. 막곡과 방혜동 사이에 중리中里 또는 중간말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막곡은 옛날에는 40호 내외였고 지금은 50호가 넘는다. 근래 큰길 주변으로 빌딩과 식당들이 많이 들어섰다. 중리는 대략 30호 내외가 거주한다. 두 마을은 본래 막곡과 같은 마을이었다가 1950년대에 분동分洞됐다. 막곡과 중간말은 2백여 년 전 풍양조씨가 개척했고 나중에 수성최씨 가산공파가 들어와서 대성大姓을 이뤘다. 마을의 주산업은 농업이다. 밭보다는 논이 많은 전형적인 논농사지대라고 할 수 있다.


방혜동은 경주이씨의 동족마을로 방혜울·방회울·방여울이라고 부른다. 경주이씨는 오제공 이탕이 입향해 4백년 이상을 살아왔다. 이탕의 여러 아들 중 차남 이정암이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선무 2등 공신에 오르면서 격이 높아졌다. 방혜동과 막곡 사이에는 사당재라는 마을이 있었다. 사당재는 10여 호쯤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당재는 방혜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오제공 이탕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됐다.


가재울은 성재 서쪽에 있다. 마을은 상가재·하가재·감나무골로 형성됐다. 가재라는 지명은 마을을 비보하는 가재산의 모양이 가재와 닮았다고 해서 유래됐다. 상가재의 다른 이름은 뒷골이고, 하가재는 넘말이다. 해방 전후부터 지금까지 상가재는 40여 호, 하가재는 33호쯤 된다. 가재울의 대성大姓은 광주이씨와 수성최씨다. 광주이씨는 350여 년 전 상가재에 마을을 이루었다가 나중에 분동分洞되면서 하가재를 형성했다. 하가재 마을에 수성최씨들이 입향한 시기는 광주이씨보다 훨씬 뒤였다. 어쩌면 막곡마을의 입향 시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가재에는 밀양박씨도 5∼6호가 산다. 하가재 마을 아래에는 감나무골이라는 자그만 마을이 하나 더 있었다. 감나무골은 송탄공단이 건설되면서 폐동됐다. 농업인구가 가장 많고 경작지는 논이 70%가 넘는다. 현재 가재울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어수선하다. 토지 일부와 집을 팔고 나간 사람도 많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적당히 보상만해주면 나가겠다는 마음이다.


막곡 118)은 일제강점기 근대교육의 산실이었다. 근대교육은 1930년 가재리 최기만의 사랑채에서 최기철이 ‘방혜야학’을 시작했다. 방혜야학에서는 가난해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는데 약 40명의 학생이 공부를 했다. 1936년에는 막곡마을 최남순이 사재를 털어 ‘가재리강습소’를 열었다. 최남순은 한학자였고 중농수준의 경제기반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재리 5개 마을의 구장을 지냈다. 강습소는 최기철과 최남순의 아들 5형제가 운영했다. 가재리강습소는 해방 후 송탄초등학교로 발전했다. 현재 후손들도 소곡장학회를 조직해 후학들의 교육을 돕고 있다.



송탄동 가재리교회 일대(2008)

| 송탄동 가재리교회 일대(2008) |



가재동의 기원이 된 상가재, 하가재마을(2008)

| 가재동의 기원이 된 상가재, 하가재마을(2008) |



주석

117) 박성순(70세), 하가재 거주, 2009년 1월 5일 자택에서 인터뷰
118) 안인준(76세), 이재순(79세) 외, 2009년 1월 5일 막곡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