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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제도의 변천과 선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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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 이전에 전통적인 지방자치의 역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양반지배층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유향소-향청-향회로 이어지는 지방자치 문화가 있었다.
19세기에는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평민들이 향회에 진출했고‘민란의 시기’라고 불리는 19세기 중엽 농민항쟁이 폭발하면서 일반 평민들도 향회에 참가하기에 이르렀다.1)
1894년 갑오농민전쟁 시기의 집강소, 1897년 독립협회 시기의 민회 등에는 평민들의 독자적인 자치 문화가 나타났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개화파는 향회를 법제화 하려 했고, 이후 각 지방의 양반들에 의해 민의소民議所가 설치되기도 했다.

 


일제는 1905년부터 도·군·부와 면 단위까지 지방행정을 정비, 장악하고자 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별도의 자치적 행정기구로 거류민단을 설치하게 하고 영사관 업무를 계승한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해 통감이 관장했다. 지방행정 정비는 치안 확보와 조세체제 정비를 통한 식민지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이 과정들은 전통적‘촌락 자치’ 및 전근대적 질서의 해체과정이자 동시에 ‘민권’적 자치를 억누르는 과정이기도 했다.2) 일제는 1907부터 1911년까지 일부지역에 지방자문기관의 성격을 갖는 지방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했다. 각 지역의 유지들로 하여금 지방행정에 대한 자문을 통해 관민의 의사소통을 하도록 한다는 취지로 설치됐으나 실제는 식민지화를 위한 원활한 재정확보에 그 목적이 있었다. 지방의원들은 면장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를 발령하고 일부 행정구역을 변경해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으로 했다. 도에는 도장관을 두고 부군도府郡島의 책임자인 부윤·군수·도사島司 는 도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도록 했다. 지방행정의 최말단기구로 317개 군 아래 4,322개의 면을 두고 면장은 도장관이 임명했다. 다시 1913~1914년에 걸쳐 지방제도를 변경했는데, 일본인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 지역에 새로이 공법인公法人으로서 부를 창설하고, 부윤의 자문 명목으로 민간인 신분의 조선인과 일본인을 임명해 부협의회를 두었다. 부협의회는 ‘내선융화’와 ‘자치능력의 향상’을 위한 것으로 호도했으나 실제는 조선인 부협의회원들은 부행정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또한 지방행정구역 폐합을 통해 군과 면의수를 축소했다.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을 4,322개에서 2,521개로 줄였다.
1915년과 191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도장관은 도지사로 개칭됐다. 도에는 도참사 3명이 임명됐고, 군과 부에도 각각 군참사와 부참사를 두었다. 참사제도는 지방 유력자들에게 지 방행정의 자문을 맡겨 지방통치의 보조적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이 제도가 폐지된 1920년 이후에는 도평의회에 그 성격이 계승됐다.
1920년 다시 지방제도가 개정됐다. 주요 내용은 부협의회와 지정면협의회의 선거 실시,참사제도의 폐지, 부·면협의회 및 도평의회 등 지방의회의 설치, 학교평의회의 설치 등이 었다. 지방의회와 학교평의회는 의결 권한이 없는 자문기관이었다. 이러한 지방행정제도의 개정은 ‘문화정치’의 주요 구성요소로서 3.1운동 직후 민심을 수습하고 치안을 회복하 며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억누르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정된 지방제도에서 지방선거는 극히 제한적인 선거였다. 즉 부협의회는 지방세 5원 이상, 지정면협의회는 면부과금 5인 이상 납부한 자만이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커다란 경제력 격차가 있어 결국 일본인을 우대하고 극히 일부 조선인만이 선거에 참여하게 됐다. 지방의회도 의결권이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부협의회원과 면협의회원은 임기 3년의 명예직이었고 면협의회원은 임명했다.도평의회는 유권자의 직접 선거가 아니었다. 도평의회원 정원 가운데 2/3는 부협의회원과 면협의회원이 선거로 2배수 후보를 선정해 그 중 1명을 도지사가 임명하는 민선과 나머지 1/3은 ‘학식과 명망있는 자’ 중에서 도지사가 임명하는 관선 등으로 구분됐다.선출직이 아니라 민선이나 관선 모두 도지사가 최종 임명 절차를 갖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1930∼1933년에 걸쳐 제2차 지방제도 개정이 있었다. 1931년 부협의회는 의결기관인 부회府會로 개편됐고 면제는 읍면제邑面制로 개정하고 기존의 지정면을 읍으로 변경하면서 지정면협의회 또한 읍회로 개편됐다. 그리고 임명제였던 면협의회원을 유권자의 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또한 1930년 12월 1일 공포돼 1933년 4월 1일부터 도제道制가 시행되 자 도평의회는 의결기관인 도회道會로 개편됐다. 면협의회는 여전히 자문기관이었고, 부회 및 읍회와 도회는 의결기관으로 변경돼 표면적으로는 다소 권한이 확대됐다고 할 수 있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모두 임기가 4년으로 연장됐다. 부·읍회와 면협의회 유권자의 자격은 여전히 ‘5원 이상의 납세자’로 제한됐다. 3)

도회의원의 경우 정원의 2/3는 부·읍회 의원 및 면협의회원의 간접 선거로 선출하고, 1/3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다. 도회의원 피선거권자는 25세 이상의 남자로서 독립된 생계를 영위하며 1년 이상 도내에 거주하는 자이어야 했다. 4)

하지만 도회의 기능은 제약조건이 많았다. 도회 의장인 도지사는 도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재의에 부치거나 재선거를 행할 수 있었고, 의결된 사항을 취소하기 위해 정회를 명할 수도 있었다. 도회는 발안권과입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오직 도지사에게만 주어진 권한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에 ‘전쟁 시국’ 총동원 정책을 추진했다. 지방의회에는 일본과 ‘천황’에 충성하며 민중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즉 전시체제에 순응적인 인물들이 선출될 수 있도록 했다. 지방선거에서 ‘추천제’를 실시했다. 그 취지는 ‘대동아전쟁’하에서 시국이 요청하는 ‘충량유위忠良有爲’한 인재를 선출하고, 지방의회를 쇄신하며, 민중이 선거운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방의회를 전시체제에 철저히 순응토록 하고, 전시총동원체제하 황국식민화정책에 불철저한 의원을 배제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2년 일부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추천제는 1943년 부·읍회와 면협의회 총선거 때 일제히 실시됐다. 전쟁이 격화되자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지방의원 임기를 연장했다.

 

주석

1) 박찬승, 『일제하 ‘지방자치제도’의 실상』, 『역사비평』 여름호(통권15호), 1991, p.5, p.29. 
2) 일제하 지방제도의 변천 및 선거제도는 동선희, 『일제하 조선인 도평의회·도회의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6)을 참조.
3) 면협의회원의 경우 면세面稅가 5원 이상인 유권자의 수가 너무 적어 선거가 곤란한 상황이 발생해 지역에 따라 4원 또는 3원으로 낮출 수 있도록 했다. 
4) 현역 군인, 도내 각 관리 및 유급 리원吏員으로 재직 중인 자, 도내 읍면장, 재직 판검사, 경찰관,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등은 도회의원이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