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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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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는 양반층 또는 평민들의 전통적인 지방자치 문화를 부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서의 지배력을 관철시키기 위한 지방통치구조를 재구성했다. 조선총독부는 지방 관관제를 발포해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의 행정구역으로 하고 도장관-부윤-군수-도사島司의 지휘체계를 두었다. 1914년에는 지방행정구역 폐합을 거쳐 220개 군에 2,521개면으로 조정했다. 군과 면의 범위를 확대해 적은 경비로 조선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자치 기관 기능을 하던 면을 식민지 통치기구의 가장 말단기관으로 만들었다. 당시 진위군은 북면·병남면·부용면·서면·송탄면·고덕면·오성면·포승면·현덕면·청북면·서탄면 등 11개 면으로 편제됐다.
1917년 면제가 실시되면서 면장은 징세기구의 가장 하부에서 세금을 부과, 징수하는 역할에서 토목사업, 농림 개량사업, 위생과 소방까지 사업범위가 확대됐다. 인구가 많고 일본인 거주자 비율이 높은 곳에는 지정면指定面이 설치됐다. 지정면에는 면장으로 일본인을 임명했고, 자문기관으로 도장관이 임명하는 상담역을 두었다. 한편 도장관과 군수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는 참사제도가 있었고 참사는 일본인이나 일제에 협력적인 조선인들이 임용됐다. 이는 식민지 주민의 참정권을 수용하기보다는 형식적 기능을 할 뿐이었다.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는 자문에 응하던 참사제도는 1920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폐지되고 그 성격은 도평의회로 계승됐다.
1919년 진위군 참사에 강한수姜閑秀와 윤종민尹鍾敏이 임명됐고 1920년 강한수 대신 부용면장을 지내던 김준식金峻植이 임명됐다. 윤종민은 1878년에 태어나 1910년대에는 진위군 송장면 장안리에 거주했다.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 혜민원 주사를 지내다가 1908년 측량학교를 졸업했다. 1911년 진위군 참사에 임명돼 1920년까지 재직했다. 이외에 사립진동학교 교감, 서정리 권농계 총무, 진위농회 평의원, 평택금융조합장으로 활동하고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맡았다.5)








+ 1920년대 면협의회원 및 도평의회원 선거

+ 1930년대 읍·면협의회원 및 도회의원 선거

+ 1940년대 읍·면협의회원 및 도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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