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읍·면협의회원 및 도회의원 선거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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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읍·면협의회원 및 도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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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29년 9월 30일 총독부령 제83호 ‘조선지방선거취체규정’을 발포했다.14)
조선에서 최초로 이뤄진 선거관리규정이었다. 이에 부제시행규칙·면제시행규칙·학교조합령 시행규칙 등도 함께 개정되고 이 규정은 1929년 10월 1일부터 시행됐다.
1930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제령으로 도제, 부제, 읍면제 등 지방제도 개정안이 공포돼 1931년 4월 1일부터 시행하며, 개정안에 따른 지방선거는 1931년 5월 20일 전국에서 일제 히 실시하게 됐다. 이에 부협의회를 의결기관인 부회로 개편하고 면제를 읍면제로 개정해 기존의 지정면을 읍으로 바꾸고 읍회를 설치했다. 또한 지방선거에서 임명제로 이뤄지던 보통면의 면협의회 의원을 유권자의 선거로 선출했다. 1933년부터는 자문기관의 도평의 회를 의결기관인 도회로 변경해 대외적으로 ‘지방자치’를 표방했다. 면협의회는 자문기관 으로 규정됐으나 부회, 읍회 및 도회는 자문기관에서 의결기관으로 변경돼 권한이 다소 확대됐다. 의원들의 임기는 모두 4년으로 연장됐다.
읍면에 대해 법인임을 규정하고 공공사무 및 법령에 의해 읍면에 속한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주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규정을 설정했다. 읍면 주민의 권리의무 및 읍면의 사무 에 관한 읍면규칙을 둘 수 있도록 했다. 읍면세와 사용료, 수수료 등에 관한 읍면규칙에는 과태료 10원 이상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읍회는 의결권을 가졌으나 면협의회는 자문기관으로 한정했다. 하지만 면협의회도 면의 공익에 관한 사건에 대해 의견을 면장 또는 관계관청에 제출하고 관청의 자문에 답신하게 하는 등 권한을 확장했다. 면협의회원과 읍회의원은 모두 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인원은 8∼14인으로 하고 임기는 1년 연장해 4년으로 했다. 면협의회원을 임명하던 것에서 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읍면장은 과거 지방관제와 마찬가지로 대우관리이지만 권한은 다소 확장됐다. 즉 읍면장에게 군수가 하던 면리원의 임면권 및 징계권이 부여됐고, 군수의 직권으로 돼 있던 면직원의 급여, 명예직의 비용 변상액 등을 읍면규칙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면협의회원은 본 지방제도 개정안 시행과 동시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1931년 지방선거는 『매일신보』에‘자치제 실시’의 첫 선거라고 선전했다. 각 지역에서는 면협의회원 후보자들의 선거전이 매우 치열했다. 선거 직전인 1931년 4월 1일자로 진위군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변경됐다. 1931년 5월 지방선거 결과 진위군 지역 각 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31년 진위군 각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15)


지역 면협의회원 당선자(103명)
평택면
朴炳奭 安鍾喆 森賢吉 西村折太郞 李成烈 閔光植 李敏烜 成周漢 黃永在 目良廣 (10명)
송탄면
柳遠協 李景載 元濟東 李容孫 崔基炳 李鍾愚 朴樹勳 尹鍾敏 趙鍾九 山崎源治郞 (10명)
북면
禹鍾哲 鄭鍾寅 嚴敬仁 邊學基 鄭衡基 權五相 鄭鍾福 洪奇童 金在喆 高鳳在 (10명)
서탄면
趙英柱 崔承舜 韓元敎 禹德玄 車鎭完 車繁奎 黃魯烈 林承國 (8명)
고덕면
玄鍾元 方喆載 吳春根 金敬泰 廉興鎭 金溶根 韓浩錫 金有成 趙伯元 (9명)
오성면
鄭時昌 金知鳳 黃魯軾 朴泰秉 鄭麟敎 金正秀 金成坤 徐圭錫 徐相政 尹明儀 (10명)
청북면
金灒基 申奎植 全殷相 金華植 金成基 金德秀 甄昌圭 牟觀鉉 金學魯 申昶雨 (10명)
포승면
崔文植 李敏石 李孝陽 李鳳鉉 李應奎 兪鎭圭 李敏馥 李原在 李秉性 李敏常 (10명)
현덕면
姜粲炯 李炳吉 鄭在聲 韓植東 孔烜烈 鄭雨明 李康鴻 李聖洙 李敏皐 李尹憲 (10명)
서면
李衆榮 方益栽 張斗鉉 鄭雲鳳 朴鍾禹 吳鳳鎭 李時雨 方菊栽 (8명)
부용면
鄭根讚 鄭成敎 方雨栽 李起鎬 李時鐸 李孝錫 吉原綾雄 小島經治 (8명)


1931년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의원 선거 결과 평택면 10명, 송탄면 10명, 북면 10명,서탄면 8명, 고덕면 9명, 오성면 10명, 청북면 10명, 포승면 10명, 현덕면 10명, 서면 8 명, 부용면 8명 등 총 103명의 면협의회원이 당선됐다. 평택면의 일본인 면협의회원은 3명으로 1명이 늘었고, 송탄면에서도 일본인 면협의회원 1명이 당선됐다.
조선총독부는 1935년 2월 21일자로 ‘선거고시 전 입후보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지방선거취체규칙'을 개정했다. 1935년 5월 지방선거에서는 선거운동이 오히려 치열해졌고 위반자들이 속출했다. 1935년 진위군 각 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35년 진위군 각 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16)


지역 면협의회원 당선자(88명)
평택면
朴炳奭(15) 目良廣 森賢吉(12) 成周漢(8) 安鍾喆(11) 李成烈(9) 黃慶秀(9) 鄭容運(9)
李敏烜(8) 西村折太郞(9) 17 )(10명)
송탄면
李容孫(12) 南昇熙(11) 柳遠協(11) 元濟東(10) 李景載(9) 野口秀吉(9) 崔中鉉(8) 金鍾喆(8)
趙成九(7) 韓鴻履(6) (10명)
북면
禹鍾龍(9) 高鳳在(9) 禹鍾哲(8) 姜洙馨(8) 權榮植(8) 嚴敬仁(8) 鄭鍾寅(7) 鄭昌淳(7)
金在喆(7) 眞木淸五郞(7) (10명)
서탄면
禹德玄(11) 趙炳武(10) 韓元敎(9) 黃魯烈(8) 韓龍錫(8) 車錫完(8) 崔箕泰(8) 山田縣義(14) (8명)
고덕면
朴龍錫(9) 宋柱憲(8) 崔容和 沈宣鶴(7) 廉興鎭(6) 文在明(5) 趙伯元(5) 韓浩錫(5)
林容龜(5) 申星澈(5) (10명)
오성면
朴泰秉(15) 金成坤(10) 徐相學(10) 洪鎭基(7) 趙熙鳳(6) 趙舜行(5) 尹明儀(5) 尹墉(4)
趙景元(4) 安公烈(4) (10명)
청북면
申昌休(12) 朴炳玉(8) 申昶雨(8) 金찬基(8) 鄭基弘(7) 牟觀鉉(6) 朴台彬(6) 金學魯(6)
金正洙(5) 甄昌圭(5) (10명)
포승면
崔文植(15) 李鳳憲1(10) 李原玉(9) 崔在和(9) 李敏燮(9) 朴齊允(8) 李鳳憲2(8) 李敏常(7)
李敏石(7) 李秉性(7) (10명)
현덕면
鄭在聲(14) 李敏東(8) 李敏喆(7) 孔季烈(7) 趙炳奭(8) 鄭○秀(7) 李麟洙(8) 李永基(6)
韓植東(7) 李常憲(5) (10명)


1935년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의원 선거 결과 평택면 10명, 송탄면 10명, 북면 10명,서탄면 8명, 고덕면 10명, 오성면 10명, 청북면 10명, 포승면 10명, 현덕면 10명 등 총 88 명의 면협의회원이 당선됐다. 1934년 4월 1일자로 진위군 서면과 부용면은 팽성면으로 통합, 변경됐는데18)1935년 선거가 진행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937년 ‘약진 평택’은 ‘신흥도시’로서 당시 경기도내에서 읍제 실시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읍 후보지였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10월 1일자로 경기도 평택면을 평택읍으로 승격시키고,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변경했다. 1939년 5월 21일 읍면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평택군에서는 유권자명부를 작성했다. 유권자수와 선거인원수는 다음과 같다. 이때 선거법에 제외된 면도 5개소가 있었다.19)


구분 평택읍 송탄면 오성면 청북면 포승면 현덕면 북면 서탄면 고덕면
유권자 153 135 143 103 130 124 116 95 103
선거인수 12 10 10 10 10 10 10 10 10
기타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적용
선거법
제외
선거법
제외
선거법
제외


1939년 지방제도가 변경된 뒤 첫 실시된 5월 선거의 열기는 매우 높았다고 한다. 1939년평택군 읍회 및 각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39년 평택군 읍회 및 각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현황]20)


지역 읍회 및 면협의회원 당선자(92명)
평택읍
西村折太郞 目良廣 李三奎 閔光植 黃慶秀 安炳喆 趙鳳行 森賢吉 鄭寅昌
李敏烜 朴炳奭 鄭容運 (12명)
송탄면
趙成九 朴英和 柳遠協 李仁善 元道植 崔南淳 趙鍾九 李兢載 上谷龜太郞 村田實 (10명)
북면
邊學基 姜浚馨 禹鍾喆 禹鍾龍 鄭鍾郁 洪成義 眞木淸立 李容厚 梁建煥 李容圭 (10명)
서탄면
趙炳益 車柄軾 韓範錫 禹德玄 尹明欽 崔箕泰 韓元敎 車聚奎 朴泰來 車鍾完 (10명)
고덕면
文瓊燮 朴容泰 朴龍錫 金溶根 安在稷 吳世正 吳春根 廉興鎭 趙伯元 文萬治 (10명)
오성면
徐泰源 金商泰 徐相政 朴泰秉 徐相學 趙景元 金奭泳 尹明儀 李敏成 尹承鳳 (10명)
청북면
朴榮勳 申昌休 方承培 牟永汶 金斗基 孔泰永 鄭基弘 朴昌熙 申源雨 甄昌圭 (10명)
포승면
崔基賢 李鳳憲 崔在和 黃鍾文 鄭基錫 朴齊允 李敏石 李昌範 李興緖 李龍鉉 (10명)
현덕면
鄭在聲 鄭雨明 鄭雨彬 韓德源 安相鳳 孔季烈 李尹憲 李永基 孔在善 李敏哲 (10명)


1939년 평택군 지역의 읍회 및 면협의회 의원 선거 결과 평택읍 12명, 송탄면 10명, 북면 10명, 서탄면 10명, 고덕면 10명, 오성면 10명, 청북면 10명, 포승면 10명, 현덕면 10 명 등 총 92명이 당선됐다. 평택읍의 경우 읍으로 승격돼 읍회의원이 10명에서 12명으로 증가했고, 서탄면은 면협의회원이 8명에서 10명으로 증가했다. 송탄면의 경우 일본인 면협의회원이 2명으로 증가했다.
1939년 5월 부읍면 지방선거는 전국적으로 일본인이 7% 조선인이 93%를 차지해 이전 지방선거 때보다 일본인의 비율이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언론은 이에 대해 일본인 입후보자 감소와 조선인 유권자수 증가가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선거에서는 호별방문을 폐지했고 투표일이 일요일이어서 투표율이 증가됐다고 한다. 후보자의 호 별방문 폐지가 신인들의 진출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했으나 오히려 신인들도 많은 표를 획득했다고 한다.21)의뢰전보를 이용한 선거 홍보전이 급격히 증가한 것도 이 시기지방선거의 대표적 특징이었다.22)
1939년 5월 평택군지역의 읍회 및 면협의회원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탈락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23)


*평택읍: 유치봉兪致鳳 최종완崔鍾完
*송탄면: 한창석韓昌錫 김종철金鍾喆 남승희南昇熙 박순석朴舜錫 원도규元道桂
*서탄면: 황노열黃魯烈
*고덕면: 김기경金奇經
*오성면: 홍종기洪鍾基 강찬홍姜粲弘 조철재趙哲載 정남수鄭楠秀 윤용尹墉
김희춘金熙春 박태병朴泰秉 김사형金思亨 김희철金熙哲
*청북면: 홍남준洪南俊 김학로金學魯 신창우申昶雨
*포승면: 박재린朴在麟 이민이李敏伊 최병순崔炳純 이민상李敏常
*현덕면: 유강열柳綱烈 이강태李康泰 최형균崔衡均 오상근吳祥根

● 1930년대 평택지역 도회의원 선거현황

1933년 5월 지방선거는 도회에 의결권을 부여함으로써 그 권한이 다소 확대됐으며, 임기도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됐다. 1933년 도회의원 선거는 후보자들이 난립해 경쟁률이 높았다. 경기도회 민선의원은 28명 정원에 100여 명이 입후보 했고 전국적으로 3.6대 1에이를 정도였다. 과거의 ‘문벌이나 재벌’ 등을 배경으로 당선된 사람들이 거의 낙선했으며 민정 정원 28명 중 19명이 신인이었다.24) 이러한 흐름은 1937년과 1941년의 선거에서도 나타난다.
진위군에서는 정원 1명에 이민두李敏斗, 한호석韓浩錫, 최기승崔基昇, 김화식金華植, 삼현길森賢吉, 원심학元心學, 정병흥鄭丙興외 1명 등 8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선거 결과 24표를 얻은 일본인 삼현길森賢吉이 경기도회의원에 당선됐고, 차점자는 18표를 얻은 한호석韓浩錫이었다.25)삼현길은 1882년생으로 일본 대분현大分縣 출신이다. 1902년 조선으로 건너와 잡화상을 하다가 농사를 경영하면서 미곡상 및 농구판매 사업을 했다. 진위군 평택면 평택리에 거주하면서 평택전기주식회사, 평택자동차주식회사 및 안성자동차주식회사의 이사,평택합동운송주식회사 감사 등을 지냈다. 1931년부터 1943년까지 평택면협의회원 및 평택읍회 의원을 지냈다.
1937년 5월 경기도회 의원 선거에는 4월 13일 신인 이민훤과 15일 신인 한호석韓浩錫,16일에 현의원인 삼현길이 출마했다. 평택경찰서는 관내 주재소를 독려하면서 입후보자 및 관계자, 유권자들의 동정을 엄중히 내사하는 등 단속할 정도였다.26)경기도 전체는 총 42명의 도회의원 가운데 14명의 관선을 제외한 민선 28명을 선출하는데 입후보자가 86명으로 종전에 없던 기록이었다.
1937년 5월 경기도회 의원 선거에서 경기도는 ‘명랑한 도정道政은 공정한 선거로부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도회 의원 선거에는 관공서 직원이 선거에 간섭하는 것을 일체 금 지했다. 연천군에서는 각 면 각 구장이 합법적으로 운동원으로 신청했으나 구장은 군면직원이라 운동원이 되는 것을 불허하고, 입후보자에게 구장으로서 운동원이 된 자들의 신청 서를 취소하라고 종용했다.27)
입후보자들 직업별은 대부분이 농업 종사자이며 회사원이 많았다. 농업 종사자란 대부분 그 지방의 지주들로서 전래의 대농들이었다. 그 외에 대서업·상업·정미업·미곡상·양 조업 종사자들이었다. 색다른 직업으로 공의公醫·운송업·변호사 등이 있고 특히 신문지국을 경영하는 신문기자도 등장했다. 언론에서는‘시대색’이 엿보인다고 표현했다.28)
1937년 5월 10일 선거에서 진위군의 도회의원으로 이민훤李敏烜이 당선됐다. 평택의 진청학원을 운영하며 무산아동의 문맹을 퇴치하는데 노력했다. 1931년 이후 평택면협의회원 및 평택읍회의원을 지내고 평택합동운송주식회사 이사, 동아일보사 평택지국 고문, 평택 금융조합 감사 등을 역임했다.

주석

14) 『조선지방선거취체규정 발포』, 『매일신보』 1929년 10월 1일자 1면
15) 『조선일보』 1931년 6월 2일자 3면; 『동아일보』 1931년 6월 10일자 5면
16) 『동아일보』 1935년 5월 24일자 5면. ( )안은 득표수이다. 
17) 西村折太郞은 1922년 진위군 산업기수로서 평택미곡대두검사소에서 근무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 1922년판
18) 『경기도의 면폐합, 4월 1일부터 실시』, 『매일신보』 1934년 3월 11일자 1면
19) 『평택군 유권자와 각면의원수』, 『매일신보』 1939년 5월 2일자 3면
20) 『매일신보』 1939년 5월 26일자
21) 『부읍면의 선거 호적』, 『동아일보』 1939년 5월 24일자 2면 
22) 『부읍면의 선거에 발착된 전보수, 6만통을 돌파』, 『동아일보』 1939년 6월 23일자 2면 
23) 『지방선거전 정세(평택)』, 『매일신보』 1939년 5월 16일자 3면 
24) 동선희, 앞의 책, p.57.
25) 『조선통치사의 신기원, 지방자체지도의 확립(경기도)』, 『매일신보』 1933년 5월 12일자 5면
26) 『평택전황 백열, 경찰진도 긴장』, 『매일신보』 1937년 4월 25일자 3면 
27) 『도의 선거운동원이 구장인 경우 불허, 연천군서 각 면에 통첩』, 『매일신보』 1937년 5월 5일자 3면 
28) 『쟁패선상 시대색, 직업별로 본 입후보자 농업이 최다수 점령』, 『매일신보』 1937년 4월 25일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