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면협의회원 및 도평의회원 선거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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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면협의회원 및 도평의회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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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기만적이긴 하지만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에 제한적 참정권을 부여해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호도하고자 했다.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은 1920년 말 자문기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방제도 개정을 단행했다. “공공단체의 자치에 의해 지방을 개발”한다는 취지 아래 지방자치를 실시하기 위한 예비 단계라고 선전했다.
1920년 지방제도 개정의 주요 내용은 부·면협의회 및 도평의회 등 지방의회의 설치, 지방선거 실시, 학교평의회 설치였다. 지방의회와 학교평의회는 의결 권한이 없는 자문기관 으로서 제한적이었다. 면협의회원의 선거·피선거·임명권의 범위는 면부과금 5원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으로 제한됐다. 보통면의 경우 선거가 아니라 군수 또는 도사島司의 임명 으로 면협의회가 구성됐다.
면협의회는 면장의 자문기관으로 면에서 처리하는 사업에 대해 협의했다. 면협의회는 명예직이며 직무의 성질 상 이를 전무직專務職이 아니고‘생활의 기초인 본업’이 있으면서 공무를 담임하는 자이다. 급료를 받지 않으며 직무로 인한 비용은 변상받을 수 있다. 협의내용은 도로·교량·관개, 농업·임업 등 산업개량·위생·소방·수방 등에 관한 사항이 었다. 학교조합과 학교비學校費는 별도로 운영돼 교육 사업은 면의 업무에서 제외됐다.
1920년대 면협의회원 선거는 임기 3년으로 1920년, 1923년, 1926년, 1929년에 각각 실시됐다. 면협의회원 선거는 먼저 면사무소에서 선거인명부를 작성하고 1주일간 열람하게 했다. 면협의회원 후보자를 각 마을에 할당하기도 했다. 선거는 선거입회인이 참석해 진행됐다.
1920년의 면협의회원 선거는 11월에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진위군 지역의 각 면협의회선거 현황은 『매일신보』 1920년 11월 27일자에 오성면협의회원 당선자 현황이 보도된 것 으로 보아 진위군 지역에서도 1920년 11월경에 협의회원 선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성면협의회원 당선자는김대경金大經·노재협盧載浹·변사진卞師鎭·최기홍崔基弘·조성근趙成根*·정기창鄭基昌*·서규석徐圭錫*·조병석趙炳奭*·최건식崔健植·한용직韓用直* 등이었다.(*는 1923년 재선) 이후 1920년대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원 선거의 경우 1923년에 실시된 선거 당선자 현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진위군 각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현황] 6)


지역 면협의회원 당선자(104명)
병남면
柳昌根 石川耐藏 李河善 久原豊 林元圭 金根培 崔泰卿 安鍾喆 權鍾台 李元承 (10명)
송탄면
洪學裕 朴樹勳 洪承赫 嚴奎永 車相建 元濟東 宋鍾錄 李達榮 李承鍾 韓鴻履 (10명)
북면
禹鍾哲 鄭鍾寅 李殷榮 梁柱元 權榮植 洪九連 全在喆 朴昌勳 李容範 李圭哲 (10명)
서탄면
韓元敎 金大熙 崔承舜 趙英柱 車鍾完 金炳威 柳寅暢 黃魯烈 (8명)
고덕면
玄永基 安在鳳 吳春根 黃魯聖 崔基昇 沈宜剛 文武爕 朴昌鎬 趙光喆 金學載 (10명)
오성면
趙成根 趙炳奭 金郁培 鄭時昌 韓用直 徐圭錫 韓麟敎 鄭基昌 韓昇錫 金顯榮 (10명)
청북면
崔基玉 李圭鳳 金華植 梁在根 金學習 朴承洙 金德秀 申慶休 朴士彬 朴大鎭 (10명)
포승면
孫相敦 李有相 崔基昇 李薄淵 朴敎陽 李敏和 李源玉 李源緖 兪鎭圭 趙吉九 (10명)
현덕면
孔榮烈 崔禹相 李昌秀 李敏星 李根昶 李康浩 尹鳳漢 鄭雨範 申鉉燾 林容肅 (10명)
서면
張南鎭 元之性 姜蘭秀 張世直 安基濬 盧元章 朴世輔 方菊栽 (8명)
부용면
李德三 吳春三 朴炳壎 崔鎭 李起鎬 鄭俊根 金用肅 方雨栽 (8명)


1923년 진위군 지역의 면협의회의원 선거 결과 병남면 10명, 송탄면 10명, 북면 10명, 서탄면 8명, 고덕면 10명, 오성면 10명, 청북면 10명, 포승면 10명, 현덕면 10명, 서면 8 명, 부용면 8명 등 모두 104명의 면협의회원이 당선됐다. 평택역이 있는 병남면의 경우 일본인 거주자들이 많아 2명의 일본인이 면협의회원에 당선됐다.


● 1920년대 평택지역의 도평회원 선거 현황

1920년 12월 10일 첫 번째 도평의회 선거가 있었고 1923년 12월 두 번째 선거가 실시됐다. 도평의회원 가운데 2/3는 부·면협의회원들의 선거를 거쳐 도지사가 임명한 민선의원 이었고 1/3은 도지사가 직접 임명한 관선의원이었다. 민선의원의 경우 조선인이 90% 내외였고, 관선의원은 조선인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일본인이 많았다. 부 지역에서는 주로 일본인이 선출됐는데, 군 지역에서는 유권자인 면협의회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조선인이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됐다.
1920년에 시행된 도평의회원 선거에서 진위군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정우흥鄭雨興이다.『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정우흥은 1878년생으로 수원군 안중면 안중리 출신이다. 관립한어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 부교관이 됐다가 육군무관학교와 법관양 성소를 졸업했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헌병대 편제가 폐지될 때까지 군법회의 판사, 육 군헌병 참위 등을 지냈다. 정우흥이 언제부터 평택지역으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진위군 도평의회원으로 활동했고, 1927년 안중금융조합장, 1930년 동아일보 평택지국 고문을 지냈다. 이 외에 1936년 『심복사중수기』를 집필했고, 심복사의 ‘능인전能仁殿’ 현판을 직접 썼다고 한다.7)
정우흥에 이어 유창근柳昌根이 1924년 4월 1일부로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 임명됐다.유택근의 성장과정과 학력은 알 수 없고 1920년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평택분국장에 임명돼 재직 중에 공진회의 일본 대분현大分縣 시찰단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1년 평택청년체육구락부 부장, 1923년 은평강습회 학부형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11월 병남면 협의회원에 당선됐다. 1924년 도평의회원에 당선된 이후 병남면장, 동아일보사 평택지국장을 맡다가 1927년 11월 15일 평택역 앞 자택에서 사망했다. 11월 17일 진위청년회 및 관 공청官公廳 10여 단체와 기타 유지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을 거행했다.
1927년 지방선거에서는 정우범鄭雨范이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됐다. 그는 1923년 현덕면협의회원에 당선된 후 1928∼1933년까지 현덕면장을 지냈다. 현덕면장 재직 중에 1928년 11월 16일자로 ‘소화 대례기념장’8)을, 1932년 10월 1일자로 일본 상훈국으로부터‘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9)
1930년 3월 지방선거에서는 박원용과 한필호韓弼鎬가 입후보해 43표를 획득한 박원용이 40표를 얻은 한필호를 제치고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됐다. 박원용은 1915∼1920년 진위군 군서기, 1921∼1922년 진위군 군속, 1923∼1928년 부용면장, 1929년 평택금융조합 조합장, 1929∼1930년 병남면장 등을 역임하고 1930년 4월 1일자로 경기도평의회원에 당선, 임명됐다.10)1931∼1933년 평택면장을 지내다가 1933년 4월 면장에서 해임됐다.11) 1933∼1938년 진위군 팽성면장(훈8등), 1939년 평택군 팽성면장을 지냈다.12)1940년 5월 9일 팽성면장 박원용이 주임관대우의 ‘거물면장’직을 그만두었다.13)

주석

6) 『동아일보』, 1923년 11월 25일자 4면
7) 정우흥의 『심복사중수기』에 따르면 심복사는 영조 43년(1767)에 중수해 1936년까지 4번 중수
8) 『조선총독부관보』, 1930년 1월 29일 
9) 『조선총독부관보』, 1933년 6월 30일 
10) 『조선총독부관보』, 1930년 4월 24일 
11) 『동아일보』, 1933년 4월 9일자 3면 
12)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15~1939년도판 
13) 『동아일보』, 1940년 5월 10일자 1면;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