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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궁예를 축출한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치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태조 6년 각 지방 호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선물을 주어 포섭하는 정책을 시행하자 삭방朔方(함남 안변)의 성주 윤선尹瑄·강주康州(경남 진주)의 장군 윤웅閏雄·하지현下枝縣(안동시 풍산면)의 장군 원봉元奉·진보眞寶(경북 청송)의 성주 홍술洪術·명지성命指城(경기 포천) 장군 성달成達·벽진군碧珍郡 장군 양문良文 등이 귀순해왔다. 그 대가로 이들 지역은 주州나 부府로 승격했다. 삭방이 등주登州로, 강주는 강주로, 하지현은 순주順州로, 진보성은 보성부甫城府로, 명지성은 포주抱州로, 벽진군이 경산부京山府가 됐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평택 지역 인근에도 수주水州(수원)와 천안부天安府가 생겼다. 수주는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이었으나 신라 경덕왕대에 수성군水城郡이 됐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이 지역의 인물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귀순해 힘껏 도운 공으로 수주로 승격했고 진위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됐다.
왕건은 태조 8년 조물군 전투에서 견훤과 인질교환을 하고 일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왔던 견훤 측의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이것이 고려측의 살해라 생각해 왕건의 인질이었던 왕신王信을 살해하고 웅진을 공격함으로써 화친관계가 깨졌다.
이후 왕건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용주龍州(경북 예천)를 점령하고 이어 운주를 차지했다.
태조 11년에는 탕정군湯井郡(온양)에 행차해 유금필로 하여금 성을 쌓게 했고, 또 충북 보
은의 삼년산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청주로 피신했던 왕건은 견훤군의 추격으로
큰 위험이 있었으나 유금필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이틈에 견훤은 죽령의 요지인 오어곡성
烏於谷城을 점령했다.
왕건은 서경 일대와 기주基州(경북 풍기)·강주岡州(영주) 등지를 순행하면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견훤은 경북 의성과 순주順州(안동시 풍산면)를 점령했다. 두 세력은 고창군古昌郡(경북 안동)에서 충돌하게 됐고,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구상하게 됐다.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택한 곳이 천안이었다. 경상도 방면에서는 승리했지만 견훤의 후
백제 세력은 아직도 충청도 방면에서는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선은 홍성과 아산을 잇
는 선으로 천안을 기지 삼아 남진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태조 19년 후백제 신검과의 마
지막 전투시 태자 무武와 박술희朴述希를 선발대로 보내 군사 1만 명을 훈련하게 했다. 이
때 평택을 천안에 속하게 함으로써 천안의 배후기지로 삼게 했다.
이에 평택현은 천안도독부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됐다. 그것은 수주의 속현이었던 진위
현도 마찬가지였으며 주군현의 관원들이 속현의 행정과 경제를 감독·관리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금유今有 또는 검무檢務로부터 지도와 감독을 받았다. 이들은 속군현의 행정사
무를 검사하고 감독했다. 이들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순찰하는 것은 중앙에
서 파견된 순관巡官의 몫이었다. 순관은 현종대에 관역사館驛使로 개명됐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조장租藏의 지시와 감독을 받았다. 조장은 속군현으로부터 조세를
거둬 창고에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속현의 향리들은 이들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모아
놓은 조세는 전운사轉運使에 의해 중앙으로 운반됐다. 조장은 중앙에서 파견된 전운사의
통제를 받았다. 그런데 검무나 조장은 그 지역의 호족이 임명했다. 태조 때만 하더라도 그
지방의 토착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