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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진위의 양반들 가운데 최경우崔擎宇·권서린權瑞麟·이배李培·최호서崔虎瑞·목함경睦涵敬·정계윤鄭季胤·정종윤鄭宗胤·김정현金廷賢 등이 난에 가담했고 양성에는 정세윤鄭世胤 과 원만주元萬周가 가담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정황은 난의 초기에 붙잡힌 가담자의 증언과 22일 안성전투 및 24일 죽산전투가 끝난 뒤 사로잡힌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3월 16일 김옥성金玉成의 공초(심문기록)에는 진위 갈원에 사는 양반 김정현金廷賢이 수하의 노비 등을 데리고 군복을 지은 후 적병에 가담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실과 양성지역 반란군의 정황이 있다.78) 3월 22일 남한도순무사南漢都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은 청주를 점령한 반란군 중 다수가 양성·용인·진위·안성 등 4읍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보고 했다.79)
3월 28일 장계에는 양성의 이의형李義衡 이 반란 주모자로 진위의 권서봉權瑞鳳과 이배李培를 지목했다고 기록돼 있다. 함께 잡힌 김술이는 보다 구체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80) 대장은 청주 송면松面에 사는 이진사, 즉 이인좌이며 병사는 송면에 사는 대장의 사촌인 이가이고 진위 자량에 사는 생원 권서봉이 청주목사를 맡았다고 증언했다. 중군은 양성 가천에 사는 생원 최성운의 아들이 맡았으며, 죽산의 수령은 진위의 최몽주崔夢柱, 청안의 수령은 수원 정내승의 아들이 각각 맡았고, 양성 월곡에 사는 이의형 형제와 친척들 및 양성 구만리에 사는 권서봉의 아우인 유학 서룡瑞龍과 서필瑞弼 등을 주모자로 꼽았다.
이의형이 주모자로 지목한 이배는 3월 26일 붙잡혀 서울로 이송됐다. 이배는 진위의 소성蘇晟과 소황蘇晃, 홍걸洪傑, 양성의 최봉서崔鳳瑞·최용서崔龍瑞·목주경睦胄敬 등을 반란군의 육장사六壯士로 지목했다.81) 3월 26일 진위현에 사는 최필대崔必大, 일명 최경우崔擎友·최이행崔以行·정중복鄭重復 등을 잡아 모두 처형했다. 진위지역에서 이인좌의 난에 참여한 양반들은 이배·권서봉·김정현·소황·소성·최필대·최이행·정종복·홍걸 등이다. 이외에도 많은 상민들이나 중인·노비 등이 이인좌의 난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위지역 양반들은 반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권서봉은 반란 모의 단계부터 적극 가담하고 있었으며 이배는 청주 병사 이봉상을 죽인 후 진위에 진을 친 오명항을 죽이고자 군진으로 난입했다가 실패하고 탈출했다. 소성·소황·홍걸 등은 이른바 육장사로 반란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원주원씨 중에서는 원만주·원백주 형제가 가담했다. 특히 원만주는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까지 다녀왔던 인물로 전국에 통문을 돌리고
호남지역을 담당하는 등 반란군에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82)
진위지역 양반들이 이인좌의 난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들이 노론이나 영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진위지역에는 소론 성향을 가
진 양반들이 많았다. 진위의 유력한 양반 가문들 중 경주이씨는 소론 완론에 속해 난에서
빠졌지만 지역의 다른 양반 가문들은 반란에 휘말렸는데 소론 준론계로 여겨지는 진주소
씨·안동권씨·원주원씨·전주이씨 가문들이다. 권서봉의 경우 이미 경종대부터 노론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권서봉은 경종 2년에 소를 올려 경종이 친모인 희빈
장씨의 묘에 전알展謁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소론 청류 계열과 노론의 인사들을 공격한 것
을 보면, 그는 소론 준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83) 영조 즉위 후 유배됐던 권서봉은 이후
정미환국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부터 반역 모의에 참여해 반란의 주역이 됐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관에 의해 불리한 처분을 당한 경우도 있다. 김정현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1714년 주막에 묵던 용인의 한 양반이 짐과 돈을 도난당하자 관가에 끌려가 난
장亂杖과 주뢰周牢 등의 형벌을 받았다. 지역사회에서 지위가 공권에 의해 무시됐다는 점이
반란에 동참하게 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84)) 평택지역에서는 벌열 가문이 다수 세거하거나
뛰어난 학자를 많이 배출하지도 못해 지역 양반 세력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사정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택지역의 양반들이 중앙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하는 것이
다. 사실 중앙과의 밀접한 연결통로도 없고, 그나마 믿던 소론 준론 세력마저 정계에서 배
제된 상황에서 이들은 더 이상 노론 위주의 중앙권력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고 결국 반란
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휘말리게 됐다. 경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은 반역을 위한 좋은 명분
을 제공했다. 결국 평택지역 양반들이 이인좌의 난에 참여한 것은 중앙권력으로의 상승욕
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평택지역이 중앙으로부터 얼마나 소외돼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인좌의 난이 끝난 뒤 반란에 가담했던 평택지역 양반가문들은 큰 화를 입게 됐다. 오
랫동안 진위의 유력 양반으로 위세를 떨치던 진주소씨, 원주원씨, 전주이씨 중 반란에 가
담했던 가족들은 모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비록 살아남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이들 가문의 사회적 위상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85)
주석
78) 『各司謄錄』 75, 英祖戊申逆獄推案, 3월 16일 金玉成 供招.
79) 『各司謄錄』 67, 英祖戊申別謄錄, 3월 22일, 南漢巡撫使 金東弼 狀啓.
80) 『各司謄錄』 67, 英祖戊申別謄錄, 3월 28일, 湖西按撫使金在魯 忠州營將申益欽 狀啓.
81) 『各司謄錄』 75, 英祖戊申逆獄推案, 3월 27일 李培 供招 .
82) 김해규, 『평택 역사산책』, 평택일보사, 2013, pp. 31〜34.
83) 『朝鮮王朝實錄』 景宗 권 14, 4년 4월 丁卯 .
84) 李鍾範, 「1728년 戊申亂의 性格」, 『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pp. 218〜219.
85) 김해규,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