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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철도부설과 한국인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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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9월 1일 개통 된 경인선(서울 노량진~인천제물포).
미국 부룩스 회사의 모걸(Mogull)형 탱크 기관차

| 1899년 9월 1일 개통 된 경인선(서울 노량진~인천제물포).
미국 부룩스 회사의 모걸(Mogull)형 탱크 기관차 |



조선은 1876년 개항 이후 열강제국 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당하면서 각 종 이권을 빼앗기게 됐다. 1894년 청 일전쟁 이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 는 구실로 열강제국들이 경쟁적으로 조선의 이권을 침탈했다. 이권은 해운 과 전신·어업·해관·철도·광산 등 이었다. 이러한 부분의 이권침탈은 조 선의 근대화 과정이었으나 열강국들의 군사적·경제적 침략과 수탈을 한층 더 원활히 진행하게 하는 한편, 근대적 기구의 운영과 자원 활용을 어렵게 함으로써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 특히 철도는 대규모의 상품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운송수단과 상품경제의 발전, 시장의 확대를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 부분이었다.



1905년 철도공사에 혹사당하는 한국 노무자들

| 1905년 철도공사에 혹사당하는 한국 노무자들 |



한국에 철도가 건설된 것은 1899년이다.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가 따낸 철도부설권을 일본의 정상자본가政商資本家들이 설립한 경인철도합자회사가 매수해 건설하게돼 노량진에서 인천 간의 경인철도가 개통됐다. 1903년 경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됐다. 러일전쟁을 코앞에 두었던 일본은 전쟁물자 수송과 대륙침략을 위해 일본과 한반도, 만주를 잇는 철도교통이 필요했다. 일본은 철도건설을 위해 강제로 토지를 수용하고 대한제국의 행정력을 이용해 인력을 충당했다. 평택지역은 제2착공구간이었다. 이 공사에 참여한 회사는 대한운수회사(사장:이완용)를 비롯한 5개의 조선인회사와 한일공업조와 야마구찌山口太兵衛같은 한일합자회사였다. 그 중에서 야마구찌가 오산에서 진위구간 공사를 했다.
당시 일본이 독점한 철도부설공사는 조선인의 막대한 희생으로 진행됐다. 일본은 우선 선로부설 토지를 철도용지라고 해 실제 필요한 면적보다 5배 이상, 심지어는 수십 배에 이르는 토지를 강탈했다. 토지를 매입하는 경우에도 그 일부를 조선 정부의 돈으로 지불했고 그나마도 헐값으로 사들였다.
일본은 정거장 부지와 함께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요구하고 군대를 동원해 현지 주민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철도 부지를 거의 무상으로 빼앗다시피 했다. 이렇게 약탈한 철도용지와 군용지는 거의 대부분을 일본인들에게 불하해 정거장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세력근거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토지를 약탈당하고 강제로 수용당한 많은 조선인들은 집과 논, 밭을 잃게 됐다. 이와 같이 철도를 부설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자행한 약탈행위와 가옥·분묘의 파괴는 철도 주변 주민과 노동자·농민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철도부설 또한 조선인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토건회사의 전근대적인 노동조직에 소속돼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철도 부근 주민들 중에서는 계속되는 강제 노동력 동원 때문에 농업이나 상업 등의 본업을 상실하고 유리·도산하는 자가 많이 발생했다. 과중한 노동과 심한 체벌로 인한 고통과 더불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이라는 착취도 이루어졌다. 철도 부설공사에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거의 무임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임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명목상 하루 임금이 경부철도의 경우 20∼30전, 경의철도 의 경우가 30∼36전 정도였다. 같은 조건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3분의 1에 불과한 매우 적 은 액수였다. 당시 5인 가족의 하루 생계비 67전의 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이었다. 이 것도 명목상의 임금일 뿐이고 중간착취 금액을 공제하고 나면 조선인 노동자가 수령하는 하루 임금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철도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부 설됐던 것이다.



[열강들의 조선 내 이권침탈 상황(1876∼1905)] 88)


연도 이권내용 이권침탈국
1876 무관세 무역권, 외국화폐 통용권 일본
1882 평안도·황해도 연안 어채권, 상해~인천 윤선 운항권, 해관 인사권
한성(서울) 상점 개설권
상해~시모토세키~부산~인천 윤선 정기 운항권

영국
1883

부산~시모노세키  해저전선 가설권, 조선연해 화물 운송권
전라도·경상도·함경도 연안 어채권, 조선연해 화물 운송권, 해관 수세권

일본
1885 인천~한성~의주 전선 가설권, 서울~부산 가설권
조선~일본 윤선 정기운항권

일본
188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창원 금광 채굴권
전라도 세미 운송권
일본
독일
1887 제주도 연해 어채권 일본
1888 두만강 운항권, 한로은행 개설구
경기도 연안 제한 어채권
군함 밀무역권
러시아
일본
1890 조선~일본 윤선 정기운항권 일본
1891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경상도 연해 포경권
원산 저탄소 설치권
일본
러시아
1892 인천~한성 한강 운항권
화폐주조원료 독점 제공권

일본
1895 운산 금광 채굴권
인천~부산, 인천~대동강, 인천~함경도 윤선 정기항로 개설권
미국
일본
1896 경인철도 부설권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채굴권
압록강·울릉도 산림 벌채권, 동해 포경권
경의철도 부설권
미국
러시아
프랑스
1897 당현(강원도 금성군)금광 채굴권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독일
미국
러시아
1898 서울 전차 부설권
경부철도 부설권,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운산(평남) 금광 채굴권
독일
미국
러시아
1900 직산(충남) 금광 채굴권 일본
1901 창성(평북) 금광 채굴권
경기도 연해 어업권
프랑스
일본
1903 평양 무연탄 채굴권 프랑스
1904 충청도·황해도·평안도 어채권 일본
1905 후창(평북) 광산 채굴권, 통신 관리권, 하천 운행권, 화폐 주조권 일본


일본군이 1905년 철도부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

| 일본군이 1905년 철도부설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한국인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 |



일본은 철도와 전신선이 통과하는 지역에 일본 군율을 발표하고 그 지역의 한국인 지방관을 사실상 일본군 사령관의 지휘와 감독 하에 두었다. 철도부설을 방해하거나 철도와 전신선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을 일본군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시키기도 했다. 이때부터 철도연변지역은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철도 공사장에서 일본인 감독들이 칼과 총으로 무장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고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감독에게 총살당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경기도의 많은 지역도 같은 상황이 전개됐다. 김포군에서는 일본 헌병이 노동자 300여 명을 모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지원자는 한 명도 없었고 결국 각 면과 리에서 집집 마다 인원을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성화가 빗발치자 당시 교하군에서는 군내 8 개 면 35동의 주민 수천 명이 모여서 노동자 모집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 군 장교가 군인 70여 명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포위했고, 각 동의 집강(執綱: 면·리의 사무를 보던 사람)을 꿇어앉히고 인부 20명을 당장 뽑아내지 않으면 이들은 포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철도연선의 피해는 재산상의 손실만은 아니었다. 일본인 철도노동자들은 부녀 자를 겁탈하고 양민을 살해했으며 비협조적인 군수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전의 군에서는 1904년 2월 일본인이 민간인 전한봉田漢奉을 사살했다. 그리고 서흥군에서는 일 본인 병사가 박창순朴昌淳과 김한규金漢奎를 살상했다. 경기도 진위군에서는 군속郡屬이 역 부 십장什長 이학수李學秀를 구타했다는 구실을 잡아 일본인 10여 명과 한국인 67명이 군아 를 습격해 죄수들을 풀어주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도서기道書記를 정거장에 있는 일본인 역부회사로 끌고 갔다.

경부철도 부설공사 기간에 삼남지방 주민들의 대일감정은 악화됐으며, 지방관의 항의가 빗발쳤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은 경찰과 군대를 파견해 노동자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됐다. 영등포·평택·천안·대전 등 기존의 파출소 설치지역 이외에 부강·신탄진·영 동의 3개소와 심천·증약·회덕 등 3개소에 순사파출소를 증설하고 각각 2명의 순사를 파 견했으며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의 행패는 줄어들지 않았다.

철도 건설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과중한 사역, 일본인 노동자들의 횡포는 철도주변 주민들 에게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철도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다. 열차운행과 철도건설을 방해하는 저항활동이 계속됐다. 서울·경기도·평안도 지역에서는 일본의 불법적인 군용 지와 철도용지 수용, 물자와 재료징발, 노동력 수탈에 저항하는 의병이 봉기했다. 의병들 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거나 철도와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일진회원을 공격했다. 수원, 영동, 옥천에서는 달리는 열차에 투석해 유리창을 파손했다. 기관차와 객차를 파손시키거 나 또한 철도 전선과 철도 시설을 절단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일제의 침탈에 저항했다. 의병 이 천안 부근의 소정리역을 공격해 역원을 총으로 위협하고 역사를 불태운 일도 있었다. 병 점역에서 30리 떨어진 생장동에 의병 700여명이 집합해 오산역과 진위역을 습격하기도 했 고 이원역 부근에서는 큰 돌을 굴러 떨어뜨려 열차의 승강구를 파손시킨 일도 있었다.



주석

88) 김정기,「자본주의 열강의 이권침탈 연구」, 『역사비평』 11, 역사비평사, 1990, pp.8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