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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서울에서 열린 경부선 철도 개통식 |
조선후기 이래 형성된 전통적인 상품유통은 수운水運 교통 위주였으나 내륙을 통과하는 철도가 놓이면서 포구 중심의 상품유통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철도는 상업유통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도시와 신시가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자 이전에 포구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상권은 쇠퇴하거나 소멸, 또는 지역 내 규모가 축소된 시장으로 변화하는 등 상업중심지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경기도 남부지역의 상업중심지였던 안성지역이 쇠퇴했고 철도역이 생기면서 평택은 새로운 유통 중심지로 부상했다.
경부선철도가 1905년 개통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평택역은 일제시대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지역이었고 철도역 설치 당시는 마을도 형성되지 않은 전답지였다. 철도 역사 주변은 물론 군청 청사가 들어선 곳도 대부분 전답이었고 변두리에 민가民家 몇 호가 있을 뿐이었다. 경부선 개통 전에는 인구도 적은 평야지대였다. 이러한 평택이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일본인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이주해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해 볼 만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지역이 됐다. 평택시는 전형적인 식민지적 신시가지였으며 일본인 이주로 본격적인 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평택역 설치로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는 일본의 토지침탈로 이루어진 것이다.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설치된 철도역은 구도시를 피해서 설치됐다. 경기남부의 가장 중심 시장인 안성이나 과거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가 제외된 것이다.
평택역은 평택군 읍내면 군문리와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사이의 황무지에 설치됐다. 통복리는 구도심과 거리가 멀어 일본인 이민자들의 정착에 유리했고, 안성천 수로와 군문포를 통해 평택평야의 미곡을 수집하거나 아산만으로부터 해산물을 받아들이기에 편리했다. 진위군 병남면에 설치된 평택역 설치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은 역의 위치문제였다. 군청소재지로 개발함에 있어 일본인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 일본 사족인 이시카와石川는 철도역 서쪽에 시가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고, 반면 평민인 다카사키高寄는 동쪽에 시가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결과는 이시카와의 주장으로 종결됐는데, 이것은 당시 평택의 상품유통기능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택과 서해안 포구 간의 연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평택역 서쪽에 시가지를 조성하는
편이 유리했다. 반면 동쪽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동쪽 내륙 평야지대의 농산물 유통과 관련
된 것이었다. 평택지역은 동쪽의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집산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고 서해안 내륙을 연결하는 상품 중계지 기능도 있었다. 시가지가 평택역 서쪽에 위치
하게 됐다는 점은 평택이 단지 철도수송에 의존하는 상품 유통지 뿐만 아니라 서해안 수운
과 관련된 전통적인 유통망 기능도 갖고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평택역은 경부철
도 역 가운데 서해안에 가장 가까운 철도역이었다. 평택은 안성과 아산의 중간지역이라는
점과 철도역 설치라는 수송상의 편리함을 갖추게 됐다.
평택시에 신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의 일이었다. 1920년대 당시 평
택리의 인구 중 40%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이 평택에 관심을 보인 것에는 경기도와 충청
도, 서해안과 연결되는 교통상의 이점이 있었다는 점과 평택평야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었
다. 동쪽으로는 장호원, 서쪽으로는 아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었고, 동서와 남북으로 화
물을 집산하고 공급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좋은 위치에 있으며, 평택평야에서 생산되는 미
곡을 이출하는 데도 편리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평택지역의 편리성은 일본인에게도 식민
지에서 새롭게 뿌리내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평택의 성장은 1910년대 평택과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 정비작업이 진행되면서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 장호원과 안성, 평택을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가 완성됐고 평택에는 군
청·경찰서·우편소·학교조합·지방금융조합·소학교·조선상업은행지점·조선흥업주
식회사·파출소·진위흥농주식회사·미쓰이물산회사대리점 등 각종 총독부의 통치기구와
일본의 식민지 상업기구들이 들어섰다. 평택평야의 미곡이 집산되기 시작하면서 미두검사
소 등이 만들어졌다. 평택의 성장은 전통적으로 대시장과 중계상업지로 기능했던 안성의
역할 중에서 중계상업지로서의 기능을 갖게 됐다. 그 결과 안성시장에 비해 일본인 거주
가 급격히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 1920년대 본정통(현 원평동) |
| 1920년대 금융조합 거리(현 원평동) |
1914년 안성시장과 평택역의 주요 상
점수를 보면 잡화상의 경우 안성은 일
본인과 조선인 상점이 각각 2개씩 이
었지만, 평택역은 5개씩 영업을 했고,
미곡상의 경우도 안성은 일본인과 조
선인 상점이 각각 2개인 반면, 평택은
일본인 상점 4개와 조선인 상점 15개
가 있었다.
일본인 거리를 본정통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는 일본인 여관·식당·잡화점 등이 생겼다. 1등 도로와 간선도로 변에는 헌병분견대·우편소·은행과 같은 근대시설도 자리 잡았다. 본정통 남쪽에는 조선인 시장인 평택장이 개설됐다. 도시와 시장이 발달하면서 통복리는 인구가 급증했다.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새로운 행정구역인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가 만들어졌다. 당시 평택 시가지는 중심에 평택리, 역 좌우에 통복리와 군문리가 등장했다. 1920년대에도 평택리는 인구가 급증했다. 평택역은 단순히 하나의 교통시설이 아니라 평택지역의 교통·금융·상업·교육·치안의 중심이 돼 갔다.
1931년 진위군 병남면은 진위군 평택면이 됐고 1938년 행정구역 조정 시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바꾸면서 평택면은 평택읍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