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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이후의 상업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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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업유통은 대부분 포구를 중심으로 해상교통을 통해 이뤄졌으나 철도가 부설되면서 포구 중심의 상품유통은 쇠퇴 또는 소멸하거나 지역 내 규모가 작은 시장으로 변하게 됐다. 평택지역은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철도역 설립으로 새로운 유통중심지가 됐다.

일본이 조선의 상업과 유통망에 대해 조사하고 보고한 자료인 『통상휘찬通商彙纂』에 의하면 경기도 남부지역 상권은 크게 4개 구역으로 분류됐다. 제1구역은 한강상류지역으로 이천·여주·장호원·목계·내창·대소원을 연결하는 것이었고, 제2구역은 금강지역으로 논산·강경·황산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제3구역은 서해안지역으로 예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신창·아산과 평택, 그리고 남쪽의 덕산·홍주·결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 3개의 구역은 모두 수운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제1구는 남한강, 제2구는 금강, 제3구는 서해안과 밀접히 연결돼 있어 수운水運을 통한 운송경로에 의해 형성된 상권이었다. 제4구역은 경기 내륙지역으로 안성과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 남부 내륙지방인데, 이 구역은 수운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으나 최대 소비지인 서울과 인접했고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 4개의 지역 중 비교적 상업이 발달한 곳은 제1구역인 장호원과 제4구역인 안성과 수원이었다.

안성은 상업지역이며 안성유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경기내륙 및 충청도 지방의 상업중 심지일 뿐만 아니라 서울의 소비시장을 배후지로 하는 중간집산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 다. 또한 아산과 평택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했고, 내륙 교통망을 이용해 수원, 서울과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강원도 지역의 산물과 둔포 등 서해안 포구를 통해 해산물이 반입 되는 곳이었다. 집산된 상품은 육로를 이용해 수원과 서울로 운반됐고, 둔포 등 서해안 포 구를 통해 인천으로 운반되기도 했다. 중부내륙지방에서 소비되는 물자도 안성을 거쳐 공 급됐다.

개항 이후 수입상품이 들어오고 외국상인들이 내륙행상을 시작한 뒤에도 안성은 경기 남 부 및 충청 내륙지방의 상업중심지를 유지했다. 수운에서 멀리 떨어진 안성은 조선 후기에 도 여전히 내륙운송로에 의해 서울을 비롯한 주요 상업지역과 연결됐다. 서해안을 거쳐 인 천으로 통하는 해로가 물자운송로로 이용되기도 했고 서해안지역은 내륙지방에 소금과 해 산물 등을 공급하는 중계지역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개항으로 인천항이 무역항으로 급부 상함으로써 인천으로부터 수입상품을 운송하는 배들의 왕래가 이전보다 빈번해졌으나 경 기남부 내륙지방에서는 여전히 육로를 많이 이용했다.

제3구역에 해당하는 평택은 예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서해안 일대의 상업권 지역이었 다. 제4구역에 속한 평택은 철도부설 이전 충청도에 소속된 구평택군이다. 평택평야에서 생산된 곡물은 주로 옛 평택의 군문포軍門浦와 아산의 둔포屯浦를 통해 유통됐다. 1900년 에도 쌀·보리·콩 등 평택평야의 산물은 군문포와 둔포를 통해 이출됐으며, 이입상품移入 商品도 군문포와 둔포를 통해 조달됐다. 평택은 안성과 아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 문에 양쪽 상업권과 연결됐고, 특히 안성을 서해안 포구와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했다. 상 업 활동이 수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평택은 아산 둔포를 위주로 하는 상 업권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둔포는 평택과 직산의 쌀 산지를 끼고 있고 서해로부터 배가 들어와 쌀을 적출해 가는 곳 이면서 해산물과 소금의 수출지이기도 했다. 둔포에는 원래 객주가 없었으나 개항 후 쌀과 소금의 집산지가 돼 1895년 당시 쌀 객주가 13호 정도이고, 소금 객주가 10여 호나 될 정 도로 선상 출입이 빈번했다고 한다.

철도 개설 이전의 평택은 수운이 편리해 충남 서해안 상업권에 포함돼 있었으나 중심은 아산의 둔포였다. 안성이 전통적인 유통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어 평택이 중요한 상품유 통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도 부설 이후 평택은 안성과 둔포를 추월해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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