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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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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617∼686) 통일신라의 승려


신라의 승려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사상을 중심으로 불교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평택은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 중 하룻밤을 자며 깨달음을 얻은 오도성지悟道聖地다. 617년(진평왕 39)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땅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633년(선덕여왕 2)에 재산을 희사喜捨하고 출가해 법명을 ‘원효’라고 짓고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初開寺라 했다.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불경을 연구하며 수도했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중국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 에서 수비군에 발각돼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661년(문무왕 원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당성 근처 수도사(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소재)에서 하룻밤을 지내다 잠 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三界唯心 萬 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뒤 경주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 쓰기도 했으나, 667년(문무왕 7) 태종무열왕의 과공주寡公主인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 에서 설총薛聰을 낳은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 으로 들어가 무애无涯의 보살행을 실천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 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 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됐다고 전해진다.


672년(문무왕 12) 분황사에서 『십문화쟁론』, 『법화종요』, 『판비량론』 등을 지었다. 675년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렀고 681년 분황사에서 다수의 주석서를 저술했다. 682년(신 문왕 원년) 대안법사와 교분을 맺으며 『금강삼매경론소』를 지었다.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수 70세, 법랍 60여 세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 經論』,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두산백과』
고영섭, 『나는 오늘도 길을 간다,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 : 한길사』
박태원, 『원효, 하나로 되는 길을 열다』
김영일, 『원효의 화쟁논법 연구: 화쟁의 실례를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논문
이병학,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사상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정원용 ,『원효의 평화사상과 그 실현방안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임팔급林八及 (생몰미상)평택임씨의 도시조都始祖


당나라 용도각 한림학사龍圖閣翰林學士·행병부상서行兵部尙書를 지내다가 당나라 문종文宗(826∼840) 대에 참소를 당해 동료 7학사인 유전劉筌·송규宋奎·최호崔冱·권지기權之奇·공덕수孔德狩·설인경薛仁敬·허동許董 등과 함께 신라로 망명해 평택현 용포리에 정착 했다. 적병이 침범하자 이를 평정한 공으로 팽성군에 봉하고 충절공忠節公 시호를 받았다. 후손들이 팽성읍 안정리에 동상을 건립 추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 『임문세보』,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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