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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孔俯(1352~1416) 문신
자는 백공佰恭, 호는 어촌漁村·수선修仙, 공소孔紹의 손자이다. 1376년(우왕 2)에 과거에 급제해 전의부령·예조총랑을 거쳐 집현전태학사가 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서응봉사·별감제조別監提調·우군동지총제·검교한성윤을 역임했다. 도교에 조예가 있어 도교를 좋아하던 태종의 총애를 받았고 조선 초기 1408년 10월 이후 서장관으로 여섯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소격전제조昭格殿提調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태종의 명에 의해 중국에 가서 도교의 초사醮祀 등 도교의식을 배워왔고 어린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광연루廣延樓·상림원上林園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413년 4월, 태종은 부친상 중에 있는 그에게 수진修眞(장생불로의 수련법)에 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1416년(태종 16)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젊어서는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교유했다. 세상에서는 그의 관대한 성품과 솔직함을 높게 평가해 팔청八淸의 우두머리라고 칭했고, 또한 초서와 예서에도 매우 능했는데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묘엄존자무학선사탑비妙嚴尊者無學禪師塔碑와 한산에 있는 한산군이색신도비韓山君李穡神道碑는 그의 필적이다. 묘는 현덕면 덕목리 고등산 동쪽에 있으며 심복사深福寺를 제궁齊宮으로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김윤후金允候(생몰미상) 승장
몽고의 1차 침입 시 용인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승장僧將이다. 평택지역에 소재하는 백현원白峴院(현 지산동 부락산 동편의 흰치고개)에 있던 절의 승려로 1232년(고종 19)에 몽고의 1차 침입 시 용인의 처인성에 들어가 싸움에 나섰다. 1232년 12월 6일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 이로 인해 몽고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됐으나 사양해 섭랑장攝郞將에 임명되고,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했다. 이후 무반으로 입신해 1253년(고종 40)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이 됐다. 몽고의 5차 침략군은 예쿠也窟의 지휘 하에 10월 충주성을 포위했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관청의 문서를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 상장군이 되고 그 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됐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가 됐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고군의 수중에 있어서 부임하지 못했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 예부상서가 됐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참고문헌 : 『두산백과』
이인영, 『처인현민의 기백과 처인성전투』, 용인향토문화연구, 2010.
김진환, 『처인성 대몽항쟁 연구』, 경기향토사학, 제15집, 2010.
소을경蘇乙卿(1325∼1385) 문신
본관은 진주. 문과에 급제해 개성부윤開城府尹과 광정대부판도판서匡靖大夫版圖判書를 역 임했다. 개성부여지승람開城府輿地勝覽에 명현名賢으로 기재됐으며, 1363년 계유년에 동구 (왜구)의 난을 당해 부소동扶蘇洞이 퇴락됨으로써 1374년 갑인년(공민왕 23) 가솔을 데리 고 진위 여좌동으로 이거했다. 묘는 여좌동 뒷산이나 실전돼 안성시 원곡면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이과李薖(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경주. 예문관대제학검교정승藝文館大提學檢校政丞 이세기李世基의 아들이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 벼슬길에 올라 상서尙書의 벼슬까지 올랐으며 묘는 진위면 동천리 선영 에 있다.
참고문헌 : 『경주이씨 족보』
이승李昇(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경주. 경주이씨 진위입향조入鄕朝이다. 이조참의로 추증된 이원보李元普의 아들로 서 조농판관曹農判官을 지냈으며, 사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됐다. 묘는 진위면 동 천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이영주李英株(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양성. 처음에 승려가 됐으나 환속해 관성현령이 됐다. 충렬왕의 사랑을 받아 내 원승을 거쳐 낭장이 됐다. 1282년(충렬왕 8) 장군으로 여러 주현의 관리 부정유무를 규찰 했으며 1285년 충청도 안집사로 있을 때 미색을 뽑아 바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 1286년 충청도의 탈탈화손으로 있을 때 영월현령 이순과 함께 횡포가 심 했기 때문에 강윤명의 난을 유발했다. 1299년 일영의 무고로 모반했다고 몰려 한희유와 함께 해도로 유배됐다가 곧 풀려났으나 한희유·유비 등과 같이 원나라에 잡혀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묘는 평택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이원보李元普(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경주. 상서尙書 이과李薖의 아들이다. 벼슬이 지인주사知仁州事에 올랐고 조선시대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추증됐다. 묘는 진위면 동천리 산166번지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이장대李將大(생몰미상) 무신
고려 고종 때 진위현 출신으로 ‘이장대의 난’을 일으켰다. 거란이 침입해 국내가 소란한 틈을 타 1218년(고종 5) 영동정令同正으로 직장동정 이당필, 별장동정 김례 등과 함께 진위현에서 난을 일으켰다. 진위현령의 부인符印을 빼앗고 창고를 열어 촌락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로 칭하고 군대를 의병이라고 해 군郡에 통지한 다음 종덕창과 하양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나눠주었다. 이어 광주로 향하려 했는데 낭장 권득재, 산원 김광계, 안찰사 최박 등이 거느린 군사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주로 달아났으나 안찰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됐다가 주살誅殺됐다.
참고문헌 : 『고려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원부車原頫(1320~1398) 문신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평택시 장안동의 연안延安차씨 선조이다. 지방어사知防禦使 종로宗老의 아들이다. 1364년(공민왕 13)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보문각 직제학 겸 지국평장사에 올랐다. 정몽주·길재·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해 주역연구에 전심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태조가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렸으나 ‘식초 다섯 말을 먹고 죽을지언정 공신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으며, 또 정언·판전농시사 등의 벼슬을 제수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뒤에 송원松原에서 하륜·함부림·조영규·정도전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명과 함께 살해됐다. 당시 고려의 충절을 지키던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학문과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를 잘 그렸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시중侍中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됐다. 철종 때 서울 선비들이 개성 송원에 사당을 세웠다. 묘소는 처음에 양주군 봉황산 양원촌에 있었으나, 1972년 2월에 장안동 월문산으로 이장 부인과 함께 합장돼 있다.
참고문헌 : 『운암실기』, 『근역서화징』, 『대동야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