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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공權士恭(1574∼1619)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안汝安이다. 1606년(선조 39)년 증광시 을과로 급제해 1614년 병조 좌랑을 거쳐 예조정랑을 지냈다. 1618년 광해군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흥해興海로 유배돼 그 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진위읍지』(1843), 『조선왕조실록』
권임길權臨吉(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안동. 부사 권정길의 동생이다. 팽성현 북촌에 거주했고 신장이 9척 장신이고 담 력과 용력이 초인적이었다 한다. 1618년 무오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1636년 옥포만호를 제 수 받았다. 인조 때 오랑캐가 서울에 들어오고 남한산성의 군비가 아주 미비할 때 충청순 영에 배속되고 감사인 정세규와 함께 군무지휘 중 험천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1867년(고 종 4)에 조정에서 특명으로 복호復戶했다.
참고문헌 : 『두산백과』, 『평택현 여지도서』
김기만金箕晩(1793∼1865)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기재器再, 호는 박치옹樸痴翁이다. 1828년(순조 28) 문과에 급제했다. 1830년 사서를 시작으로 1833년에는 공중좌도 암행어사의 왕명을 받고 민정을 살폈다. 1850년 한성부 판윤 1853년 이조판서·예조판서, 1858년 이후 평안도 관찰사·전라감 사·평안감사·형조판서·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1862년(철종 13) 기로사耆老社에 들었 다. 묘는 안중읍 덕우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김대명金大鳴(1604∼1637) 무신
본관은 김녕, 호는 성원聲遠이다. 훈련원첨정 김충좌金衷佐의 아들로서 벼슬이 성진포방어 병마절제사成津浦防禦兵馬節制使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남한산 성으로 옮길 때 어가御駕를 호위했다. 원종공신에 봉해졌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됐다.
참고문헌 : 『두산백과』
김만균金萬均(1631∼1676)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정평正平, 호는 사휴思休이다. 1652년 증광시增廣試와 1654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1659년 부수찬을 1662년 장령 수찬, 정언 등을 했고 1663년 사간과 집의, 1664년 부교리, 1666년 부응교, 1668년 집의 등을 역임했다. 1669년 필선·교리, 1670년 사인 등을 거쳐 1671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됐다. 동년 정삼품 담상관인 동부승지와 승지를 끝으로 관직을 마쳤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김만근金萬謹(1667∼1729)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자신子愼이다. 1702년(숙종 28)에 병과丙科에 합격했다. 동년 설서를 시작으로 1703년 사서, 1704년 고성현령固城縣令과 용궁현령龍宮縣令을 역임했다. 묘는 당초 청북면 옥길리에 있었으나 후손이 광주시 퇴촌면 무수리 산5번지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김무택金茂澤(1715∼1778)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원박元博, 호는 연소제淵昭齊이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해 장원별제, 주부를 거쳐 한성판관이 됐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었으나 고묘하병좌考墓下丙坐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김상엄金相儼(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백공伯恭이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올라 1789년 부사용副司勇직을 시작으로 1792년 회덕현감, 1799년 안성군수安城郡守, 1805년 곡성현감谷城縣監, 1818년 첨지僉知가 됐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서 고묘하考墓下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김상임金相任(1753∼1808)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숙도叔度, 호는 관선제觀善齊다. 1795년 홍릉참봉을 시작으로 종묘부 봉사, 상서부직장尙瑞副直長이 됐다. 1802년 의성현감義城縣監, 1806년 교하군수交河郡守를 역임하고 1808년 원주판관原州判官이 됐다. 묘는 안중읍 용성리 자좌子坐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김세담金世淡(1691∼?) 무신
본관은 경주. 1691년(숙종 17) 현덕면 운정리 구억촌 마을에서 김만중의 장남으로 태어 났다. 1728년(영조 4) 나이 37세 때 왕세자 관례 가례 경설 별시 문과 및 무과 병과 전시殿試에 합격했다. 성품이 활달하고 행용양위좌부장의 벼슬을 거쳐 말년에는 정3품직 절충장 군 행용양위장군 부호군에 올랐다.
참고문헌 : 『두산백과』
김세량金世亮(1706∼?) 무신
본관은 경주. 1706년(숙종 32) 생으로 현덕면 운정리 구억촌 마을에서 김만중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유년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1728년 영조 당시 23세에 무과에 합격했 고 이듬해 1729년 12월에는 내금위에 예차預差되고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용의 교지를 받 았다. 1754년 덕진만호德津萬戶에 이어 수원부병마좌별장水原府兵馬左別將등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김세한金世澣(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광산, 자는 한지澣之, 지산동 우곡의 광산 김씨 파조派祖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 해 지방관을 지내고 훈련원첨정을 거처 부정으로 있던 1534년 1월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 명종 때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로 주로 수군에서 활약했다. 1557년(명종 12) 2월 19 일 경기 수사 직위를 사양했으나 왕이 그대로 있을 것을 명했다. 이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555), 경기수사(1557), 화령부사(1558), 강원도 순경사(1560) 등을 역임했다. 묘는 서울 신림동에 있었다가 광산 김씨 집성촌인 지산동 우곡으로 이전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김순택金純澤(1714∼1787)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유문儒文, 호는 지소志素이다. 1744년 갑자 식년시에 합격했다. 관직 에 나아가 1752년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1754년 랑천현감浪川縣監, 1758년 안산군수安山郡守를 거쳐 1775년 무송부사茂松府使, 1781년 선공감 부정과 부솔副率등을 역임했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참고문헌 : 『사마방목』, 『승정원일기』
김영적金永迪(?∼1903)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혜길惠吉이다. 1886년 박사博士를 시작으로 1887년 시강원필선과 이조정랑을 지냈고, 1888년도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1891년 이조참의, 1899년 정3품인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900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역임했다. 1901년 장례원 소경과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지냈다. 묘는 청북면 현곡리 건의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김욱한金頊漢(1471∼1536) 문신
김녕김씨의 평택 입향조다. 사육신 백촌白村 김문기의 증손이다. 김문기는 사건 당시 아들 현석(영월군수)과 동시에 순절했는데 나머지 사람은 모두 공초供招에 승복했으나 오직 김문기만이 고문에 불복했다고 실록에 기록돼있다餘皆服招 惟文起不服(세조실록 6월 2일). 김문기 선생은 삼족을 멸하는 중형이 집행됐다. 손자 충윤忠尹은 상주에 정속(거주 제한)됐다. 충윤의 아들인 김욱한도 15세가 되면 연좌제 때문에 안산 산속에서 숯을 구어 연명하고 있는 백부忠柱를 찾아가 학문을 익히고 다시 서해바닷길로 남하해 지금의 삼정리(당시 수원부 오정면 삼주리)에 정착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처절한 한시가 남아있다.
‘自尙州遁跡水原 恒切望鄕飮悢歎 粉骨養孫奉遺訓 破綻家門必再建: 나는 상주에서 수원으로 도 |
묘는 안중읍 삼정리 산 35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김육金堉(1580∼1658) 문신
본관은 청풍, 호는 잠곡潛谷이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0년(광해군 2)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고, 이른바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해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데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 가평군 잠곡리潛谷里에 은둔,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했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됐고, 1624년(인조 2)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인조 초반에 음성현감·전적·병조좌랑·지평·정언·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음성현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백성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627년 청淸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중지해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1638년(인조 16)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곳에서 도내의 토지대 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했고, 비리를 확인하고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 1649년 대사 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됐고, 1652년(효종 3) 좌의정에 이르렀다. 1655년(효종 6) 76세 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줄곧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통해 민생 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충청도관찰사 시절에 백성 수탈의 방법이었던 공물법貢物法 을 폐지하고 미포米布로 대납하는 대동법을 실시했고(1651년, 효종 2), 1657년(효종 8)에 는 전라도 지방에도 실시했다. 자신이 가평 잠곡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목격한 백성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이해와, 각 지방의 수령·감사로 여러 번 재직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 다. 1623년 음성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 면서 조정에 대해 부세를 재촉하지 말고 요역을 감면해줄 것을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 는 것에도 노력했다.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만을 유통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서 찾았다.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했고, 1651년(효종 2)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해 서울 및 서북지방에서 유통 되게 했다.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평택시 소사동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 『두산백과』
김육, 『잠곡유고』, 민족문화추진회역
박병련, 『잠곡김육연구』, 태학사
김재용金在容(1845∼?)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헌경軒卿이다. 1882년 증광별시에 합격해 부수찬을 시작으로 1884년 교리, 1885년 상례를 거쳐 참의와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1887년 이조참의, 1889년 회령 부사, 1890년 예방승지, 1892년 사헌부대사헌, 1896년 궁례부특진관(종2품), 1900년 시 강원첨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참고문헌 : 『국조방목』,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김재헌金在献(1799∼1882)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문징文徵이다. 1831년 진사를 시작으로 1834년 영춘현감永春縣監, 1851년 금성현령金城縣令, 1857년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했다. 1874년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 호조참의와 공조참판에 올랐다. 묘는 청북면 토진리 오봉산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김재현金在顯(1808∼1889)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덕부德夫다. 1843년(현종 9) 문과에 합격했다. 1853년 안의현감安義縣監을 거쳐 1869년 예문관제학과 형조판서가 됐다. 이후 1870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1875년 이조판서, 1880년 공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1885년 시강원 좌빈객이 됐고 봉조하가 됐다.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청북면 현곡리 건의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김충좌金衷佐(1586∼1637) 충신
본관은 김녕, 호는 군보君甫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다 순절했다. 순절한 뒤 애마가 갑옷을 물고 집까지 와서 전사한 사실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에 추증됐다. 묘는 안중읍 삼정리 산35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두산백과』
남두징南斗徵(1617∼1690)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천서天瑞이다. 관직은 선릉참봉, 공조좌랑, 사직서령, 돈녕부 판관을 지냈다. 문집으로 ‘지천산록枝川散錄’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묘는 고덕면 당현리에 있으며 묘갈은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지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남명익南溟翼(1602∼?)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만리萬里이다. 1635년 한성부 참군, 1637년 부사과·전적·형조좌랑·예조좌랑 등을 거쳐 1639년 충청도도사, 1642년 호조정랑, 1643년 사과에 오르고 동년 안성군수安城郡守가 됐다.
참고문헌 : 『진위읍지』(1843)
남언창南彦昌(1644∼?)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응숙應叔이다. 남명익南溟翼의 아들이다. 1684년 승정원 부정사를 시작으로 1685년 예조좌랑, 고창현감高敞縣監, 1689년 병조좌랑을 역임했다. 1692년 충청도사忠淸都事, 1696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거쳐 1701년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됐다. 이후 나주목사羅州牧使,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냈다.
참고문헌 : 『승정원 일기』
문무섭文武燮(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남평. 중시조인 강성군 익점益漸의 18세손으로 헌종 때 진위현 고덕면 좌교리에 서 출생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유학에 출중하고 일찍이 진위 향교의 직원直員으로 봉직했다. 향교 재직 시 대성전각의 중수 및 보수 사업을 완성해 그곳 유림들로 부터 찬사를 받았다. 유학사상 보급에도 크게 진력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박계옥朴啓沃(1511∼1572) 무신
본관은 고령, 자는 중설仲說이다. 조선 명종조 무신이다. 중종 때 영월부사를 지낸 세호世豪의 아들이다. 명종 때 무관으로 부사직을 거쳐 동지의검 부사와 오위도청부 부총관을 역 임했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새능)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박기준朴耆俊(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고령, 자는 국노國老이다. 찰방 진성盡性의 아들로 1566년(명종 21)부터 1621년 (광해군 13)까지 입사入仕했고 벼슬은 병마절제도사를 거쳐 황주판관겸진관,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역임했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 능절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박문수朴文秀(1691∼1756)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진위에서 출생.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졌 고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다. 이듬 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됐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다시 사서司書에 등용됐으며,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됐다. 이어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됐다. 17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됐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됐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했다.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 해 병조판서로 재직 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해 이를 시행하게 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됐고,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 시 궐 안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 씩 수리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풀려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했다.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때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했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했다.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대백과』
김성희, 『박문수의 경세관 연구』, 동국대 대학원, 2009.
방은순, 『박문수의 붕당인식과 국가재정론』, 충남대 교육대학원, 2008.
심은석 ,『박문수 설화연구』, 공주대, 1996.
박미생朴美生(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고령. 충숙 왕조 문하시중이던 고양부원군 박선우의 아들이다. 시조 언성의 13세손으로 평택 출생이고 태종 조에 문과 급제로 입사해 벼슬이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박사란朴思爛(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고령, 증예조참판 미생美生의 아들이다. 조선 초에 청북면 덕우리 수촌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入鄕朝다. 1438년(세종 20년)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과 성균관 전적을 역임했다. 세조 대위에 찰방察訪으로 참여한 공이 있어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됐다. 묘지는 부천시 작동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고령박씨 족보』, 『국조문과방목』, 『조선왕조실록』
박세호朴世豪(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거정巨正, 호는 용휘龍揮이다. 전라도 관찰사 처륜處綸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입사해 벼슬이 예조정랑을 거쳐 영월 부사를 역 임했다. 중종조 기묘사화로 동문수학한 조광조가 반대파당에 해를 입게 되자 유생들과 같 이 통곡痛哭을 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도리어 해를 보고 투옥됐다가 바로 사면됐다. 묘는 청 북면 옥길리 산41-1번지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박재화朴再華(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고령. 장사랑인 후문의 아들로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해 행용양위 부사 과, 1689년(숙종 15) 백치첨사白峙僉使, 1700년(숙종 26) 오위장五衛將, 1702년(숙종 28) 운봉현감雲峯縣監 등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박진성朴盡性(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고령, 자는 자순子順이다. 선조 때 용성현 수촌땅 태생이다. 1540년(중종 35)부터 1618년(광해군 10)에 무반으로 오위도총 부총관을 지낸 계옥의 아들이다. 선조 때 황산찰 방과 평능찰방을 역임토록 임명받았으나 임지를 사양했고 그 후 왕이 그의 효심에 감탄하 고 재차 임명해 임지에 부임했다가 중앙으로 전직하게 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해 일생 을 마쳤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능절)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박처륜朴處綸(1445∼1502)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거경巨卿, 호는 잠조당潛照堂이다. 청북면 덕우리에서 사란思爛의 장남 으로 출생했다. 1470년(성종 1)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경연 전경· 홍문관 정자를 겸하면서 신숙주 등과 함께 수찬관으로 『세종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했 다. 1483년 예조 정랑과 장령을 지내고, 1489년 왕이 장차 중용할 목적으로 남양 부사로 보냈을 때는 선정으로 권농과 학교를 일으킴으로써 남양 고을에 많은 선비가 배출되는 등 치적을 올렸다. 1494년(성종 25) 관압사管押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대사간이 되고, 홍문관부제학·지제교를 역임했다. 형조 참의를 거쳐 전라 관찰사로 임명돼 선정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대부大夫가 됐으나 가산을 돌보지 않았고 효우孝友가 돈독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박천건朴天健(생몰미상) 문신
자는 자이子以이다. 남양에서 팽성으로 이주해왔다. 경학과 사학에 무불통달하고 스승 없이 학문을 정통했다. 그는 중용과 역리 등에도 무불정통했다. 많은 기법을 감춰두고 드러내지 않음으로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문하생인 김상국은 후에 크게 입신했으며 은사로 존경하고 사제의 예절이 정연해 보는 사람마다 양인의 미덕을 칭송했다.
참고문헌 : 『평택현팽성지』
방덕룡方德龍(1561∼1598) 무신
본관은 온양, 자는 낙천樂天. 팽성현 북촌 출신이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호의好義의 손자로 원복元福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악이씨安岳李氏다. 1588년(선조 21)에 무과에 급제했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원균 휘하에 들어가서 크게 활약했다. 1597년 정유재란 시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부사 이영남, 만호 안여종安汝棕과 함께 절이도에서 복병했다가 적을 협공해 크게 이겼다. 원균·이순신·진린 등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1598년 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장이 돼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38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그 공을 기리어 형조참의에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했다. 팽성읍 원정리에 충효각忠孝閣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대백과』, 『평택현여지도서』
서명장徐命長(1698∼1767) 문신
본관은 달성, 자는 선백善伯이다. 숙종 때는 대제학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일생을 학행에 전념한 학자다. 벼슬은 사산 감역에 제수됐다. 묘는 안중읍 덕우리 돌모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서종흡徐宗翕(1677∼1753) 문신
본관은 달성, 자는 중익仲益이다. 관직에 있을 때 백성을 돕는 치정을 근본으로 하고 달성 서문의 가통을 수호함으로서 많은 격찬을 받았다. 관직은 1733년 돈녕참봉을 시작으로 사재주부·금부도사·남청 별제·장악주부·사옹 첨정 등을 역임했다. 관직에서 사임하고 숙종 때 수원부 토진면 오봉산하(현 청북면 토진리)로 낙향 해 그의 직계가 13대에 이르고 있다. 묘는 청북면 토진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소담蘇覃(1350∼1411) 문신
본관은 진주. 진주 부소동晋州扶蘇洞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판도공과 함께 진위 여좌동 (현 도일동)으로 이거했다. 이곳에서 학문과 성리학에 몰두하던 중 동문수학한 삼봉 정도 전의 천거로 1395년 운주령겸권농방어사雲州令兼勸農防禦使에 임명돼 평안도 운주로 부임 했다. 정사를 바르게 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내직인 전고사典庫使와 봉직랑을 지내고 1398년 무인년에 왕자의 난으로 문헌공 정도전과 남은 등이 피살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진 위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 『진주소씨족보』
소수연蘇壽延(1493∼1553)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인수仁叟이다. 무과로 급제해 중종 때 서반관아 오위 중 충무위에 들어가 사정司正을 거쳐 부사과·부장·사과를 역임한 후 부사직에 이르렀고 온화하면서도 강 직하며 남다른 충성심과 치밀한 집무로 칭송을 받았다. 묘는 지산동 와우산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진주소씨족보』
소숙蘇淑(1488∼1549)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원천泉原, 호는 창주蒼卅이다. 문정공 조광조趙光祖 음애공 이은李誾과 교분이 두터워 학문적 교류를 가지며 성리학을 공부했다. 중종2년 20세에 진사에 일등으 로 등과했다. 중종4년 별시문과에 등과해 옥당에 들어갔다. 교서관정자 예문관시교를 거 쳐 성균관 전적을 역임했다. 1510년(중종 5) 홍문관부교리 홍문관 직강에 보직됐으나 병으 로 고향에 돌아와 요양했다. 중종 12년에 의정부 사인·홍문관 교리와 성균관 대사성이 됐 다. 외직으로 밀양부사·개성유수·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중종18년 경기감사·호조 판서·오위도총부 총관을 거쳐 1535년(중종 30) 이조판서·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묘는 이충동 영신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진주소씨족보』
소영蘇榮(1436∼1483) 무신
본관은 진주. 진위 여좌동(현도일동)에서 출생했다. 1406년(세조 6)에 무과로 급제해 첨 정僉正에 올랐으며 1467년 삭주부사로 있을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참여해 공을 세 웠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있다.
참고문헌 : 『진주소씨족보』
소응종蘇應宗(1556∼1625)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비승丕承이다. 무과에 등과해 1606년(선조 39)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다. 묘는 지산동 와우산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소준蘇濬(1518∼1592)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청숙淸淑이다. 무과에 등과해 고성포만호高城浦萬戶를 역임했다. 사후 좌승지左承旨를 증직 받았다. 묘는 지산동 와우산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진주소씨족보』
소흡蘇潝(1516∼1588)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혼원混源이다. 진위현 여방면(현 도일동)에서 출생했다. 1564년(명종 19)에 삭주부사로 임용되고 뒤이어 평안도 병마우후로 있으면서 호족胡族 침입을 격퇴했다. 국경지방수비 공을 인정받아 1566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기용되고, 1569년(선조 2)에는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뒤 함경북도병마절도사·평안도 병마절도사·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묘는 지산동 와우산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신명한申鳴漢(1676∼1730) 무신
본관은 고령, 자는 성원聲遠이다. 영의정 신숙주의 9대 손이다. 1703년 무과에 합격해 1705년 선전관, 1707년 무겸, 1708년 훈련첨정, 1709년 충청병후에 이어 1712년 익산군수益山郡守가 됐다. 이후 1715년 고부군수古阜郡守, 1728년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묘는 청북면 율북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신숙주申叔舟(1417∼1475)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공조참판 장檣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해 동시에 생원·진사가 됐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농시 직장이 되고, 1441년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했다. 1443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했다.
1456년(세조 2) 병조판서로 국방에 필요한 외교 응대를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맡 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1462년 영의정 부사가 되고, 1464년 사직했으며 1467년 다시 예조를 겸했다.
예종 즉위 후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 개찬·산정을 위임받아 완성 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를 편찬했으며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 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 세력 강약, 병 력 다소, 영역 원근, 풀 속 이동, 사선 내왕 절차, 우리 측 관궤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해 일 본과의 교빙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저서로는 『보한재집』이 전하는데 1644년(인조 22) 7세손 숙이 영주 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사당은 청북면 고잔리 905(원고잔)에 있다. 1850년대(조선 철종 초) 신숙주, 성종의 부 마인 신항申沆(1477-1507), 중종의 부마인 신의申檥(1530-1584) 등 3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고령 신씨 일문과 지방 유림 협력으로 세워졌으며 1988년 중수했다. 또한 평택시 향 토유적 제8호로 지정한 ‘신숙주 영정 및 감실주독’이 보관되고 있다.
참고문헌 : 박덕규, 『신숙주평전』둥지, 1995.
신무식, 『보한재 신숙주의 한시연구』, 단국대교육대학원, 1993.
박경희, 『해동제국기에 나타난 신숙주의 대일인식』, 이화여대 대학원, 1984
신치申埴(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평산, 자는 사치士埴로 진사進士이다. 팽성현의 대유학자이다. 유년기부터 문장과 재덕이 출중한 사람으로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고는 낙향해 향학과 경학에 힘써왔다. 학 풍을 전수받고자 많은 문하생이 출입했고 지도한 문하생은 대부분이 대과에 급제했다. 관 아와 공자문묘의 누각보수에도 헌신한 공로가 지대했다. 팽성현지를 기초했고 많은 문헌 을 편찬한 지방 명문의 대 유학자이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심순택沈舜澤(1824∼1906) 문신
본관은 청송, 자는 치화穉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850년 문과에 급제, 1861년 부제학 을 거쳐 이조참의가 됐으며 1862년(철종 13) 예방승지, 1874년(고종 11)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881년 개항 이후 개화자강정책을 추진시키기 위해 신설·개편했던 통리기무아문사, 율례사의 당상경리사로 사무를 관장했 고 기계군물함선당상으로 신무기 제조 및 군사 훈련을 청나라에 의뢰하는 한편 일본 군사 시설의 시찰을 장려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도봉소당상都捧所堂上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됐다. 1884년 우의정, 그 뒤 좌의정을 역임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수구당 내각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1896년 아관파천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 의정으로 임명됐다. 공홍식 옥중 살해 사건이 계기가 돼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고, 체직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을 반대했으며 조병세 등이 자결하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그는 매국노를 규탄하고 원로대신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묘는 진위면 봉남리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안효인安孝仁(1544∼1628) 문신
본관은 순흥, 자는 행원行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율곡 이이에게서 학문을 배워 1568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묘는 진위면 마산리에 있으며 좌의정 김상헌이 지은 행록과 참판 김학순이 지은 묘갈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오달제吳達濟(1609∼1637)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윤해允諧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사람으로 충신이다. 이충동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학문을 배웠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 부교리가 됐다.
1638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그의 상소문에는 “신에게 병사 수만을 주시고 적을 치라 하시면 격월검隔月劍을 백두산에 갈아 도화마桃和馬에 두만강 물을 마시게 한 뒤에 적의 창자를 밟고 피와 티끌을 씻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윤집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끝까지 항변했다. 심양성 서문 밖에서 홍익한·윤집과 함께 1637년 3월 처형당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3학사’라 부르고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됐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됐으며 광주廣州 남한산성 현절사, 평택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 창렬서원, 영주 장암서원, 고령 운천서원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평택에서는 그의 덕을 기리는 유허문비遺墟文碑를 이충동의 옛 집터 뒤편에 세웠으며 이후 이충택지개발로 인해 택지지구 내 공원으로 이전했다.
참고문헌 : 오달제 『충렬공유고』
정옥자, 『병자호란기 언관의 위상과 활동-삼학사에 대한 재평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박광운, 『현절사와 삼학사』, 경기향토사학, 2007.
성남문화원, 『남한산성과 삼학사』, 성남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997.
우남양禹南陽(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단양, 자는 몽뢰夢賚, 호는 운곡雲谷이다. 조선전기의 시인. 팽성현 북면(지금의 원정리 부근) 사람이다. 명종 때의 처사處士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아버지는 현령縣令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해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훈구파의 정치현 실에 염증을 느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일찍이 학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헌 부 감찰에 제수됐으나 사양하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화담 서경덕徐敬德, 원정 최수성 崔壽峸, 모재 김안국金安國과 교유했으며 궁리격치窮理格致의 학문에 힘썼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본래 집안이 부유해 소유할 노비가 2백 명에 이르렀으나 친척들이 마음대로 차지하도록 내버려두고 여생을 곤궁하게 살았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 『동유사우록』, 『연려실기술』, 『일민전』, 『평택현팽성지』
원각元慤(1811~?)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성백誠伯이다. 원몽元蒙의 12세손이며 적성현감공의 8세손이다. 1892 년(고종 29) 대왕대비 승하 시에 봉 능간 양주했다. 왕의 특명으로 1893년에 통정대부로 제수되고 동년 11월에는 돈녕부도정으로 1895년 가선대부, 돈녕부사에 올랐다. 묘는 도일 동에 있다.
참고문헌 : 『원주원씨족보』
원결元潔(1665∼?) 무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8대손이고 현령 고성공의 고손이다. 1704년(숙종 30) 갑신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통정대부, 위원진 병마첨절제사에까지 오르고 후에 가선대부, 동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이고 비문과 상석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경의元景義(1855∼?) 문신
자는 여현汝賢. 원몽元蒙의 14대손으로 현감 적성공의 10대손이다. 고종 조에는 내부참서의 벼슬에 올랐고 그 후 통훈대부에 이렀다. 묘는 도일동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국량元國良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석보碩輔다. 원몽의 증손, 원임元任의 셋째 아들로 용모가 단정하고 청빈한 생활로 일관했다.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한 인품을 지녔다고 한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급제하고 전성서직장典性署直長의 관직에 올랐다. 1598년(선조 31)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낙향해 초야에서 여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균元均(1540∼1597)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평중平中이다. 고려 태조 때의 병부령 극유克猷의 후손이다. 평택 도일동에서 준량俊良의 장남으로 태어난 뒤 자질이 뛰어나 일찍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을 거쳐 조산 만호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공이 컸으므로 부령 부사로 특진됐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 부락을 격파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왜적 침입이 예상되자 선조는 육군의 장수에서 경상도 우수영의 수군절도사로 발령을 내고 나라의 방비를 맡겼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즉시 척후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면서, 경상남도 해역을 사력을 다해 방어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조정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했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등지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매번 적을 이겼는데 우리 군함으로 적선 측면으로 돌진해 적의 배를 깨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왜적의 배는 삼나무로, 아군의 배는 소나무로 돼 있어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했다.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돼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했다. 1594년 12월 충청 병사로 전출됐고, 얼마 후 전라좌병사로 전속됐다. 병사로 재직 중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했으며, 조정에서도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았다. 1597년 1월에 경상 우수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돼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을 통제하게 됐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권율 장군과 합동으로 육지와 바다를 지키고 있었으나 권율 장군은 수군이 먼저 나가 싸우라하고, 그는 육지의 주둔지를 공격해야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 다. 나라에서는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권율의 주장대로 먼저 수상전을 하도록 강요하는 바 람에 경상도 전역의 함대를 이끌고 7월 14일 출동해 거제도 부근 칠천량에서 적과 조우하 고 맹렬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등과 함께 최후를 마 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록돼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 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됐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 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이 있다. 도일동에 사당과 신도비·애마총이 있으며, 묘는 부인 파평 윤씨와 합장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은식, 『원균 그리고 이순신』, 타오름, 2007.
이정일, 『임진해전의 용장 원균』,울산대인문과학연구소, 2005.
『원균, 잃어버린 임진해전의 용장 원균』, 서해문집, 2002.
『壬辰倭亂 硏究: 水軍活動, 軍糧供給 및 宣武功臣 策勳을 中心으로』, 중앙대 대학원, 1989.
『壬辰倭亂當時の元均提督の再照明 アジア公論』,1985.
『壬亂時 元均의 功過에 關한 一考』, 고려대 교육대학원, 1978.
원권元權(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성흥聖興이다. 원몽元蒙의 10세손이며 적성공의 6세손이다. 1749년(영 조 25) 무과에 급제하고 중추부사에 올랐고 통정대부 첨지 중추 부사에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명元溟(1679~?) 무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8대손이며 현감 적성공의 고손이다. 1719년(숙종 45) 기해년에 무과에 합격해 벼슬이 용양위부호군에 이르고 절충장군에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몽元蒙(생몰미상) 문신
조선 건국 후 양주 송산에 은거하다가 1398년 진위군 여방면 여좌리(평택시 도일동)로 이주했다. 원주 원씨 600여 년 세거지 입향조이다. 벼슬은 증손 원준량에 의한 증직으로 통훈대부 군자감정이 됐다. 부인은 숙인 진주소씨(소을충의 여식)다.
참고문헌 : 『송탄시사』
원사달元士達(1576~1652) 문신
본관은 원주. 1576년(선조 9) 원몽元蒙의 후손으로 출생했고, 1608년(선조 40) 향시에 급제해 장사랑에까지 올랐다. 통정대부에 오른 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도일동으로 낙향해 후학에 힘썼다. 묘는 도일동에 있으며 비석과 신도비神道碑, 상석床石 등 석물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사웅元士雄(1575~1597) 무신
원몽元蒙의 5대손이며 원균의 독자이다. 18세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연소한 나이로 아버지 원균을 따라 종군했다. 원균 장군이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할 당시에 함께 전사했다. 전란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추서했고, 훈련원정으로 증직했으며 원릉군에 추봉推封했다. 묘는 진위면 마산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장주식, 『원사웅』, 문학동네, 2010.
원사진元士震(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5대손이고 식埴의 장남이다. 전국의 팔장사란 별호를 얻을 정도로 힘이 세고 무술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후 만주를 석권한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위협하자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1618년(광해군 6) 1만 3천의 요동파병군 도원수로 강홍립을 보내면서 관형향배의 밀명을 내려 실리외교를 폈고 강홍립은 후금에 거짓 항복했다.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후금군의 기습으로부터 구해냈고, 조방장이었던 김응하 장군과 함께 1619년(광해군 7) 3월 4일 심하深河 사르후 전투에서 순절했다(심하도강深河渡江). 그때 공적으로 나라에서 어모장군(어영대장)과 선전관을 제수했다. 묘는 진위 백치에 배위인 전주 유씨의 청을 들어 북향으로 썼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사철元士喆(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5대손이며 식埴의 차남이다. 1664년(현종 5) 갑진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94년(숙종 20) 용맹과 무용武勇을 인정받아 호국충신이 됐고 용양위부호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수의元壽義(1861~1930)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화경化慶, 호는 학봉鶴峯이다. 원몽元蒙의 14대손이다. 진위향교의 직 원을 역임하면서 문묘전객文廟殿閣에 많은 보수사업을 실현했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p>
원순빈元舜賓(1628~?) 무신
본관은 원주. 군자감정공 원몽元蒙의 7대손이고 고성공의 증손이다. 1660년(현종 1) 경자 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벼슬이 동지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랐고 후에 가선대 부, 호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묘는 월곡동에 합장했으며 상석과 망주석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식元埴(생몰미상) 문신
원몽元蒙의 4대손이며 1654년 갑오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예빈시부정에 올랐다. 그 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가정대부 등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원주원씨족보』
원연元埏(1543~1597)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광보廣甫, 호는 충절忠節이다. 도일동에서 준량俊良의 차남으로 태어나 큰집인 수량遂良의 양자로 입적됐다. 1567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 내다 왜적이 쳐들어와 경기도로 올라오자 진위가 한강 남쪽의 요충이니 지켜야 한다며 재 산을 털어 진위현안 청년들을 모으고, 병기를 만들어 의병을 조직했다. 진위현 남쪽 산루 山樓에 진을 치고 적의 북상을 방비하던 중 용인의 김량장리에 왜적이 들어와 머문다는 소 식에 의병을 거느리고 적진에 쳐들어가 대패시켰다.
이후 각 읍에서도 군사를 모집해 왜적을 물리쳐 왜군은 경기좌도를 함부로 침범하지 못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연기현감에 특배했다가 적성(경기 연천군)현감 겸 양 주진관 병마절제도위로 전보시켰다. 적성현감 재직 시 고을에 불이 나서 농사가 황폐되고 촌락이 비게 되자 백성들을 돌아오게 했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등 정사를 잘 돌보아 칭송 이 자자했다. 1829년(순조 29)에 나라에서 임진창의훈에 들게 하고 이조참의에 추증했으며, 전란시의 충절을 높이 사서 도일동 안골에 충절정려忠節旌閭를 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염元燫(1725~1794)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자유子維다. 원몽元蒙의 12세손이고 고성군의 8세손이다. 1725년(영조 1) 태어나 1754년(영조 30) 병인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오위장을 거쳐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고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70세 고령으로 생을 마쳤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오상元五常(1543~?)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서경瑞景이다. 군자감정공의 11세손이고 적성공의 7세손으로 1768년(영조 44) 무자년에 출생했다. 1796년(정조 20) 병진년에 향시에 급제하고 첨지중추부사와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고 합장했으며, 석물은 대형상석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임元任 문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손자이다. 1433년(세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참판·겸오위도총관을 지냈다. 항상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생활했다고 전해지며 말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원균의 공덕으로 가선대부·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同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됐다. 도일동에 묘소와 문관석文官石·석상石床·동자석童子石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저元樗(1725~?) 문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10대손이고, 적성공의 6대손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1781년(영조 5) 진사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첨지중추부사,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전元㙉(1545~1597) 무신
원균 장군의 셋째 동생으로 도일동 내리에서 출생했다. 임진년 왜적이 침입하자 고성현령으로서, 원균 휘하의 종사관으로 종군했다. 정유재란 시 원균과 함께 해전에 나가 전사했다. 통정대부 선전관에 추증됐으며, 묘는 이충동 직촌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송탄시사』
원준량元俊良(생몰미상) 무신
원몽元蒙의 증손. 원임元任의 둘째 아들로 1512년(중종 7)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예조 의 관상감 봉사, 춘추관 기사관, 세자시 사서,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쳤다. 1557년 경상좌도 수사 수군절도사, 1562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63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577년(선 조 10)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나이가 많아 관직을 퇴하고 향리인 도일동으 로 낙향했다. 그의 아들 원균이 선조 때 무관으로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이 되자 원준량 은 증직으로 평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서됐다. 묘는 도일동 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경기도인물지』
원지元遲(1548~1620) 무신
원균의 넷째 동생이며, 광해군~인조 때의 무관이다. 무과에 급제해 평안도의 삭주도호 부사로 재임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 병자호란 시에는 군민과 더불어 호적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봉직한 삭주군민이 애민·선정을 기리는 선정공덕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 『송탄시사』
원태의元台義(생몰미상)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광삼光三이다. 원몽元蒙의 14대손이며 적성현감공의 10대손으로 1850 년(철종 1) 경술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용양위 부사과를 역임하고 승훈랑 시종원 시 종이 되고 후에 선략장군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합장했으며 상석과 망주석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현상元顯常(1777~?)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명君明이다. 원몽元蒙의 11세손이고 적성현감공의 7세손이다. 그 는 1777년(정조 1) 생이고 1820년(순조 20) 병진년에 무과에 합격해 벼슬이 동지의금부사 에 이르렀고 그 후 가선대부, 이조참판에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홍노元弘老(1712~?) 문신
본관은 원주. 원몽元蒙의 9세손이고 적성공의 5세손이다. 1744년(영조 20) 갑자년에 진사과에 합격해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홍좌元弘佐(1694~?) 문신
본관은 원주. 군자감정공 원몽元蒙의 9세손이고, 고성공의 5세손이다. 1694년(숙종 20) 갑술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 그 후 자헌대부에 올랐다. 묘는 이충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후元厚(1835~?)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윤집潤集이다. 원몽元蒙의 13세손이고, 적성현감공의 9세손이다. 1862년(철종 13) 임술년에 무과에 급제해 수안군수 겸 황주진관 동첨병마절도사도위가 되고 그 후 통정대부 동지돈녕부사에 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후덕元厚德(1859~1919) 문신
본관은 원주, 자는 덕수德修다. 원몽元蒙의 13세손이다. 일제 초기 진위군 여방(송탄)면장직을 역임했고 면장 재임 시 면정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원후등元厚鄧(1802~?) 문신
본관은 원주. 군자감정공 원몽元蒙의 13세손이고, 고성공의 9세손이다. 1830년(순조 30) 경인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후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후풍元厚豊(1801~?)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덕재德裁이다. 원몽元蒙의 13세손이고 적성공의 9세손이다. 1835년(헌종 1) 을미년에 무과에 급제해 장흥현감 겸 경주 진관 병마절제도위에 이르고 후에 무사랑 도위, 경력무신, 겸선전관과 통정대부까지 올랐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원후황元厚晃(1836~?) 무신
본관은 원주, 자는 치함穉咸이다. 군자감정공 원몽元蒙의 13세손이고 적성현감의 9세손이 다. 1858년(철종 9) 무오년에 무과시에 오르고 용양위 부사과에 올랐다. 그 후 벼슬이 올 라 선략장군에까지 오른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윤종의尹宗儀(1805∼1886) 문신
본관은 파평, 자는 사연士淵, 호는 연재淵齋이다. 찬성 윤임의 후손으로 윤식의 아들이 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도사 김재도金在度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6세 때 증 조모 김씨가 천자문과 당시를 가르쳤는데 즉시 암송했다고 한다. 18세 때 생원시에 합격 해 1852년 서부도사가 되고 1855년 종부시주부를 거쳐 장악원으로 옮겼다가 효릉령, 문 의현령을 지내고 어머니상을 당해 귀향했다. 1862년 삼남에 민란이 일어나자 구폐의 방 책을 아뢰고 장서원별제 김포군수를 지냈다. 1864년 대흥군수, 1867년 충풍군수 강릉부 사, 1870년 옥구현령 등 지방관으로 선치해 비가 세워졌다. 1882년 돈령부사로 파광군坡光君에 습봉되고 호조참판을 지냈다. 그해 공조판서 도총관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884년 80세가 되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됐다. 1891년 3월 16일 효정공孝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청북면 토진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주성尹柱聖(?∼1945) 문신
본관은 파평, 자는 우정又庭이다. 관직은 좌승지이다. 판서공인 승례承禮의 계파로 판도 공版圖公의 20세손이고, 윤헌(이조판서)의 장자로 오성면 금곡리에서 고종 때 태어났다. 일찍이 한문과 예서에 능통하고 또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한 선비였다. 20세 때 문과에 오 르고 벼슬이 올라감에 따라 승정원 부승지, 우승지(정4품)에 올랐다. 1910년 국사에 뜻이 없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묘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윤집尹集(1606∼1637) 문신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됐다. 1636년 이조 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돼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됐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오달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해 승지와 시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해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해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심양성 서문 밖으로 끌려가 사형 당했다. 세상에서는 홍익한·오달제와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광주의 절현사·강화의 충렬사·평택(팽성)의 포의사우褒義祠宇·홍산의 창렬서원·영주의 장암서원·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됐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택지가 강화읍 월곶리 615번지에 있는데 현재 건물은 없고 밭으로 변해 비석만 남아있다. 1884년(고종 21) 세워진 비석 앞면에는 ‘충신고학사 윤집택지’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김로진이 글을 짓고 황운조가 썼다.
참고문헌 : 정옥자, 『병자호란기 언관의 위상과 활동-삼학사에 대한 재평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박광운, 『현절사와 삼학사』, 경기향토사학, 2007.
성남문화원, 『남한산성과 삼학사』, 성남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997.
윤헌尹瀗(1856∼?) 문신
본관은 파평, 자는 원장元章, 호는 황제惶濟이다. 영구營久의 아들로 영신榮信에게 입양됐다. 1885년(고종 22) 문과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규장각 직각이 됐으며, 서장관에 임명돼 동지사 조병식을 수행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7년 홍문관응교·시강원 겸사서가 됐으며 이어 성균관 대사성·우부승지·이조 참판·협판내무부사·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96년 나주부 관찰사로 부임했으며 1902년 궁내부 특진관·시강원 첨사가 됐다. 1903년 태의원경이 됐고, 이어 특명전권공사로서 미국에 파견됐다. 말년에 고향으로 낙향해 여생을 마쳤다. 묘는 청북면 토진리 산마루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이격李格(1595∼?) 문신
본관은 함평, 자는 여정汝正이다. 시조 언彦의 15세손 대교공 양근養根의 현손이며 증增 가선대부嘉善大夫인 한瀚의 손이다. 벼슬에 나아가 청산현감을 역임했다. 재임 중 농촌개척 과 농민생활 향상에 공적이 지대해 향민의 찬사가 높았다. 이후 사복시주부, 영월군수 등 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만호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경만李慶萬(1661∼1750) 문신
본관은 용인, 자는 이경而慶이다. 관직에 나아가 봉상사직장奉常寺直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묘는 포승읍 만호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계조李啓朝(1793 ∼1856)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덕수德叟, 호는 동천桐泉이다. 백사 이항복의 7세손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석규의 아들이다. 1822년(순조 22)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후 음직으로 판관이 됐다. 1831년(순조 31) 식년문과에 2등으로 급제했고 헌종 때 이조참의와 경기감사, 경상 감사를 역임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대사성을 역임했다. 1848년 공조판서 예조판서 1854년 이조판서를 지냈다. 아들 유원의 명예에 의해 봉조하 및 영의정에 추증됐다. 예서 와 해서 등 글씨에 뛰어났다. 유작으로 경릉비문景陵碑文이 있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묘는 진위면 동천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광기李光沂(1729∼1790)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도원道元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1767년 훈련주부訓練主簿, 동 년 추파만호楸坡萬戶, 1768년 감찰監察과 훈련첨정訓練僉正, 1783년 홍충병우후洪忠兵虞侯, 1784년 홍주영장洪州營將 및 풍기군수豊基郡守, 1786년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 읍 희곡리(죽곡竹谷)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엄李光淹(1722∼1783)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경문景文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해 1762년 부장部將, 1764년 군기주부軍器主簿, 1765년 감찰監察, 1768년 기장현감機張縣監 및 경주진영병마절제도위慶州鎭營兵馬節制都尉를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홍원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점李光漸(1739∼1793)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청원淸原이다. 1771년(신묘년) 무과武科에 급제해 1788년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1789년 훈련주부訓練主簿, 1790년 도총도사都摠都事, 1791년 훈련첨정訓練僉正, 1792년 황해병우후黃海兵虞侯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도대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좌李光佐(1674~1740)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이다. 진위면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오성부원군 항복恒福의 고손이며, 1694년(숙종 2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청환직을 두루 거쳤다. 1697년 부수찬, 1708년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이조 참의를 지냈다. 1715년(숙종 41)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6년 숙종이 소론을 배척하면서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 당했다.
1718년 예조 참판으로 등용됐고 경종이 즉위한 1721년 호조 참판을 거쳐 사직司直됐다. 재직 중 왕세제王世弟(영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해 경종으로 하여금 이를 취소토록 한 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했다. 이후 소론이 집정하자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됐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좌부빈객과 병조 판서를 거쳤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영의정에 오르면서 실록청 총재관이 돼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의 보유편을 편찬했다. 1737년 세 번째로 영의정이 됐으나 박동준의 모함으로 사망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운곡실기雲谷實記』가 남아있다. 묘는 진위면 동천리 선영先瑩에 있다.
참고문헌 : 이광좌, 『운곡실기』, 1972.
이희환, 『이광좌의 정치활동과 노소론의 대립』, 조선시대사학회, 2000.
이광택李光澤(1738∼1792)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후지厚之다. 1759년(기묘년)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1775년 수문장守門將을 비롯해 1778년 선전관宣傳官과 운총만호雲寵萬戶, 1780년 훈련주부訓練主簿, 1782년 훈련판관訓練判官, 1783년 훈련첨정訓練僉正, 1784년 경상좌병우후慶尙左兵虞侯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화양리(용동龍洞)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한李光漢(1698∼?)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1737년(영조 13) 겸춘추단兼春秋單이 됐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使를 증직 받았다. 묘는 포승읍 석정리 해조촌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협李光浹(1738∼1810)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성윤聖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759년 수문장 守門將, 1761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금부도사禁府都事, 1776년 무겸武臣兼宣傳官, 1777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778년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화양리(용동)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광호李光浩(1706∼1780)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자상字祥이다. 1730년(경술년) 무과武科에 급제했고 1759년 부장部將, 1761년 전설별제典設別提, 1762년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묘는 안중읍 학현리(율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대기李大器(1720∼1805)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여안汝安이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했다. 묘는 포승읍 홍원리 산173-10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대원李大源(1566∼1587)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호연浩然이다. 군수 석필碩弼의 증손. 진사進士 인仁의 손자이며, 춘방 春芳의 아들이고 목사 전우성全佑聖의 외손이다. 포승읍 내기리 출신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으로 있다가 녹도만호가 됐다. 1587년 남해안의 손죽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추격해 20여 척의 배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붙잡아 수사(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심암에게 바쳤으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라는 요청을 거절해 미움을 샀다. 1주일이 지난 후 다시 왜구가 흥양興陽(고흥)에 침입하자 심암의 명으로 피로에 지친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병해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가 원병을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3일 간의 고군분투 끝에 패전해 포로가 된 후 항복을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앞서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심암과의 관계를 알게 된 조정으로부터 심암은 파면되고 대신 수군절도사에 발령됐으나 조명朝命이 도달하기 전에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으므로 병조참판에 추증됐다.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흥양의 쌍충사에 제향됐고, 평택에 충신정문이 세워졌다. 묘소와 사당은 포승읍 희곡리에 있고 신도비가 건립돼 있다. 손죽도에도 충렬사 사당이 세워져 있고 『이장군사우중수기』가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평택문화원, 『충렬공 이대원』, 2011.
이만영李晩榮(1624∼1670) 무신
본관은 광주, 자는 취숙就叔이다. 양주목사楊州牧使 상원象元의 둘째 아들이다. 1651년(효종 신묘년辛卯年) 무과에 급제했다. 1659년 부사과副司果를 거쳐 1664년 장연현감長連縣監을 역임했다. 묘는 칠원동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진위읍지』
이방영李邦榮(1777∼1826.4.5.)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성서聖瑞이다. 1801년(신유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1812년 첨지僉知를 시작으로 1814년 안흥첨사安興僉使, 1820년 수원 화녕전수문장華寧殿守門將, 1823년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도대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배호李配浩(1785∼1835) 무신
본관은 전주. 수원부 가산면 상리(지금의 현덕면)에 거주했다. 1819년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시작으로 1821년 의영주부義盈注簿, 중추도사中樞都事를 지냈고 1826년 고원군수高原郡守 1829년 부호군 오위장五衛將이 됐다. 함흥토포사咸興討捕使 겸 중군中軍이 돼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됐다.
참고문헌 : 『일성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이병규李炳奎(1820∼1868)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경칠庚七이다. 1844년(헌종 10) 무과에 급제해 1865년 특채첨사特寨僉使로 부임하면서 왕으로부터 활·화살·화살통 등을 하사받았다. 1866년 고령진첨사高靈鎭僉使를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홍원리 마장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상원李象元(1584∼1645) 무신
본관은 광주, 자는 백현伯玄이다. 진위 입향조 수함守諴의 고손이다. 1612년(광해 임좌년) 무과에 등과했다. 무예에 뛰어나 시사試射에서 세 차례나 수석을 해 시상을 받았다. 1624 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군관 신경진 申景禛의 종사관으로 난 평정 시까지 참여했다. 1625년 오위장에 오르고, 1632년 삭주부사朔州府使, 1644년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 했다. 묘는 진위면 마산리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서李曙(1449∼1498) 덕원군德源君
본관은 전주, 자는 정수晶叟, 호는 종덕암,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세조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근빈謹嬪 박씨朴氏다. 세조는 왕비 윤씨에게서 의경세자와 예종을, 귀인 박씨에 게서 덕원군과 창원군을 얻었다. 이서는 심성이 온후하고 효행이 강직했다는 평을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해 그의 학덕은 사해에 떨쳤으며, 당대의 명현인 영남의 김종직 金宗直과 깊은 교분이 있었고 성리학에도 밝았다. 이서가 10세 되던 1458년(세조 4) 덕원 군이 봉해졌으며, 어려서 의경세자의 생일에 초대되고, 매사냥을 할 때도 동행하는 돈독한 관계였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고, 동생이었던 예종이 즉위했다. 이해 10월에 있었던 남이南怡 장군의 옥사獄事에 왕실의 종친으로서 적극 관여해 수충보 사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 2등에 올랐다. 다음해 5월 이서는 공신에 대한 포상으 로 영정이 그려져 각에 보관되고, 반인伴人 8명, 노비 10명, 구사丘史 5명, 전지田地 1백 결, 은 25냥, 표리表裏 1투, 내구마 1필과 역적으로 몰린 민서의 첩 중비와 문치빈의 첩 눌가의 딸 문용비를 받았다. 성종조에 종부시 도제도가 돼 종실을 규찰하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1471년(성종 1) 이조판서 권맹희가 왕족들의 역할을 평가할 때 “다른 왕족들이 덕원군과 같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에서 대략 짐작된다. 그러나 1472년에 방호련· 김효동 등 3천여 명과 함께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불공을 드린 것이 문제가 돼 창원군과 더 불어 삼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방호련만이 처벌됐다. 이에 덕원군은 자신이 주도한 일에 방호련 등만 처벌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가 이 역시 문제가 됐지만 왕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했다. 1474년 10월 아내가 죽자 왕이 부의賻儀로 쌀과 콩 40석과 종이 1백 권을 하사했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많은 사림파의 유생들이 희생당하게 됐고, 그 가운데 첫 번째 부인의 장인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이 핵심이었으므로 연좌돼 처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건으로 사림파의 많은 유생들이 희생당하자 고덕면 당현리로 낙향해 여생을 마쳤다. 첫째 처는 지중추부사 김종직의 딸이고, 둘째 처는 함안군咸安君 윤말손尹末孫의 딸이며, 셋째 처는 참지參知 양일원楊逸源의 딸이다. 묘소는 고덕면 당현리 산63-1 능곡 간좌향이었으나 후손이 2009년 10월 김포시 대곶면 송마리 50-12번지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석李錫(1639∼1700)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자규子圭이다. 이대원 장군의 증손이며 시조 이언의 18세손이다. 무과에 급제해 곽산군수와 충청수사 등을 역임했다. 이대원장군의 증손으로 소실된 사당재건과 교재를 재청원해 현종 때 사액을 교부받고 숙종 때 신도비를 건립 하는데 역할을 했다. 묘는 포승읍 희곡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석필李碩弼(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함평. 시조 함풍군咸豊君 언彦의 12세손이다. 독자로 출생해 일찍 문과에 급제했다.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역임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겨 군민의 숭앙이 높았다. 배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 인仁은 생원이 되고 차자 의義는 단천군수端川郡守를 지냈다. 묘는 포승읍 내기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성길李成吉(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경주. 팽성현 누리樓里에 거주했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시 충청감사 정세규의 영병 휘하의 전초관前哨官이었다. 광주로 도읍을 옮겼을 때에는 적병의 습격을 당해 부하 장졸을 인솔하고 응전했으나 과불기적寡不己敵으로 일시 후퇴했다가 다음날 다시 적의 대군과 결전하다 전사했다. 나라에서 군자주부에 추증하고 충신명려 했다.
참고문헌 : 『평택현여지도서』
이성부李聖符(1583~1624) 무신
본관은 전주, 자는 존중存中이다. 참봉 문익文益의 아들이며, 도일동의 원주원씨 문중이 외가로 6세 때에 도일동으로 이주해 평택인이 됐다. 부친 이문익(1558∼1588)이 양주군 남면 신산리에 살면서 원연元埏의 딸을 맞아 들였으며, 여기서 아들 성부를 얻고 일찍 죽 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 원씨는 아들과 함께 본가로 이주해 성부를 키웠다. 성품이 강직하 고 의협심이 높았으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무과에 급제해 선 전관이 되고 이어 비국랑으로 정승 이덕형·이항복의 공첩公牒을 맡아 처리했다. 도총부도 사에 승진해 경력으로 전직됐다가 문천군수로 나갔다. 북청의 성역城役이 있자 병사의 계 청으로 중군이 돼 일을 잘 감독해 통영 우후로 승진했고, 전선戰船을 수리한 공으로 가선계 嘉善階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이괄과 함께 선봉장이 돼 공을 세웠고, 강화부사로 나가 수군의 반 발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라 훈련원도정이 됐다. 1624년 이괄의 난 이 일어나자 우방어사로 좌방어사 이중오와 더불어 황해도 평산을 목표로 진군해 1624년 2월 4일 신계의 석영에 진을 쳤으나 반군이 평양을 함락하고 순천을 거쳐 수안·황주를 지나 평산을 공략했다. 저탄에 진을 치고 반군과 대전했으나 패전하자 물에 투신 자결했 다. 난이 평정된 뒤 병조판서에 추증됐으며 충신정문이 도일동에 세워졌고, 문중에서 덕암 산 남서편 기슭에 장군의 유품으로 묘를 쓰고, 장군의 집 우측 산자락에 애마의 무덤을 만 들어 기억하게 했으며, 양자를 들여 장군의 맥을 잇게 했다. 1684년(숙종 10) 황해도 금천 의 민충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 『진위읍지』, 『경기인물지』,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이세준李世俊(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광주. 중추부영사領事 (정1품) 극균克均의 아들이고 선조 때 공신인 한음 덕형德馨 의 5대조이다. 경기도사와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역임했다. 당초 묘 는 진위면 마산1리 오룡동五龍洞에 있었으나 후손들이 1979년 양주군 진건면 용정리로 이 장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이세필李世弼(1642∼1718)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군보君輔, 호는 귀천龜川, 진위현출신이다. 영의정 항복恒福의 증손, 예 빈 시정 정남의 손. 타고난 효자여서 30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단지수혈하고 밤을 새워 간병했으나 끝내 상을 당해 3년간 거상居喪했다. 숙종이 즉위하던 1674년 제2차 복상服喪문제로 스승 송시열이 남인의 탄핵으로 삭직 당하자 많은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그 신원을 상소한 끝에 영광에 유배됐다가 1678년(숙종 4) 풀려나왔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서인이 등용될 때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듬해 사복시 정·장악원정이 돼 태묘의 악장을 정리했다. 1699년(숙종 25) 사헌부 장령에 제수됐으나 사직한 뒤 상주목사가 돼 기황飢荒의 해결과 적폐의 혁신, 학교의 진흥 등 선정과 풍속교화를 베풀었다. 1717년(숙종 43) 당시의 권신 이이명의 전횡專橫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과 강학에만 전심했다. 예학에 밝았으며 좌찬성에 추증됐고 시호는 문경이다. 영광의 백산서원에 전향되고, 오현사 및 김제의 용암서원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논변경설』, 『답문의체』, 『악원고사』, 『소주서』, 『동호예설』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송탄시사』
이수문李守文(1781∼1841) 무신
본관은 함평. 어려서부터 수재로 학문과 지혜가 탁월했고 강직한 성품이었다. 1804년(순조 4)에 무과에 급제해 장원별제掌苑別提가 됐다. 1812년 다경포만호多慶浦萬戶, 1825년 무신겸 선전관과 추파만호秋波萬戶를 역임했고, 1833년 판관 및 훈련원 첨정이 됐다. 1839년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냈다. 묘는 포승읍 방림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승훈李承薰(1756∼1801) 문신, 천주교 최초 영세자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천주교당에서 교리공부를 한 뒤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드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을 가지고 귀국,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제도를 채택,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했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돼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했으나, 1787년 복교復敎해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돼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1791년 평택현감平澤縣監을 역임했다. 평택현감으로 재직할 때 항교의 문묘文廟에 절을 하지 않아 향교의 유생들이 문제를 삼은 적도 있다. 17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됐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됐다가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됐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윤유일 등은 붙 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됐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의금부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 당했다.
참고문헌 : 『평택시민신문』
조기철, 『이승훈의 종교활동과 그의 후손연구』, 인하대교육대학원, 1990.
김규성,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대한 제학설에 관한연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2004.
유홍렬, 『이승훈과 그 후손들의 순교』, 한국사학회, 1964
이양근 李養根(?∼1499) 문신
본관은 함평. 대교공파조待狡公派祖이다. 1438년(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 합격 했다. 집현전 한림대교와 통예원좌통례 및 감찰 등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내기리 산10 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국조문과방목』
이연손李延孫(1404~1464) 무신
본관은 경주. 이매李邁의 증손曾孫이다. 무공武功이 뛰어나 교하현감交河縣監의 자리에 올 랐고 한성소윤漢城少尹을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한성부윤漢城府尹·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 임했다. 조정에서 영의정에 추서追敍했다. 묘는 진위면 동천리에 있다.
참고문헌 : 『진위읍지』
이우석李禹錫 (1683∼1767)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우경虞卿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난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도순무사都巡武士 오명환吳命煥이 이끄는 진압군에 참여 적장 정세윤鄭世胤을 생포 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양무원종 일등공신 揚武原從 一等功臣으로 책록策錄 됐다. 1729년 수안遂安군수, 1738년 삼수부사三水府使, 1743년 청주영장淸州營將, 1748년 숙천부사肅川府使, 1762년 혜산첨사惠山僉使 등을 역임했다. 묘는 안중읍 학현리(율리栗里)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이운용李雲龍(생몰미상) 무신
팽성현 서촌에 거주했다. 재예才藝가 절인絶人해 궁술과 승마에 뛰어났다.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1590년(선조 23) 선전관이 되고 또 임진왜란 시는 경인주부로서 자원 출전했고 도원수 신립 막하에 선봉장이 되기를 청해 충주 달천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난 후에 아들이 의관을 수습하고 팽성현 서면에 장례했고 나라에서는 충신의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 『평택현여지도서』
이원영李元榮(1579∼1653) 무신
본관은 전주.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완흥군完興君이다. 관직에 나아가 능양군 종倧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공을 세워 분충찬모 정사공신奮忠贊謨 靖社功臣이 됐다. 1617년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 1623년 용양위 부호군 교통현감, 1624년 용양위 부사직 겸 오위장, 1625년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 五衛張, 1630년 장흥도호부사, 1635년 풍천부사豊川府使를 역임했고 1637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호위군관, 1648년 오위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덕목리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이유식李儒植(1828∼1905) 무신
본관은 함평. 1851년 무과에 급제해 1871년 종사관을 거쳐 1872년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역임했다. 1874년 광양현감, 1878년 부호군과 우림위장을 지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유직李攸直(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양성. 단종 때 마전 군수를 지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은둔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정협 등과 함께 은육신으로 일컬어진다. 1457년 단종이 죽자 단종이 기거하던 영월을 향해 매일 예를 올리고 통곡했다. 후에 정협 등과 함께 변장하고 장릉莊陵(단종의 능)에 들어가 곡을 했는데 이 때 하늘에서 곡성이 들리면서 단종이 사육신과 함께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1875년(고종 12) 도내 유생들이 충절을 예조에 상계해 정려사액旌閭賜額을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됐다. 묘는 죽백동 산4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경기인물지』
이유현李維賢(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비윤丕胤이다. 1604년 함평현감, 1605년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장만 도원수와 함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인조때 훈록 과 함께 도총부 부총관을 제수받았다. 이후 1630년 부호군, 1637년 산성별장을 끝으로 관 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은석李殷錫(1699∼1766)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성좌聖佐다. 무과武科에 급제해 1737년 수문장守門將이 됐다. 1739년 무겸武臣兼宣傳官. 1740년 벌등만호伐登萬戶, 1746년 훈련주부訓練主簿, 1747년 도총도사都摠都事, 첨정僉正을 거쳐 1748년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승차했다. 1750년 나주영장羅州營將, 1751년 겸우림위장兼羽林衛將, 1756년 가덕첨사加德僉使, 1757년 내금위장內禁衛將, 단천부사端川府使를 역임했다. 묘는 안중읍 학현리(율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이인규李仁奎(1808∼1861)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이춘而春이다. 1821년(신사년)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1832년 부사과 副司果, 1833년 수문장守門將, 1835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동년 기장현감機張縣監, 1848년 갑산부사甲山府使와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도대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인석李寅錫(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양성. 시조 상주국 수광秀匡의 17대손이고, 호조참판 진강震鋼의 아들로 상서원당 의 11대 손이다.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무장·문천·남원·진주·해주·원주·황주·공 주·영암 등 9주 목사를 역임했다. 원주목사 재임 시 백미 3백석을 풀어 기민을 구호한 공 으로 조정에서 공적을 치하하고 포상했다.
참고문헌 : 『진위읍지』
이재李榟(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함평. 시조 언彦의 16세손이고 인계仁桂 영동정令同正의 10세손이다 1624년 이괄 李适의 난 때 몽진하는 임금을 호종해 무사히 도강해 생명을 구했다. 난 평정 후 진무원종 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책봉됐다. 훈련원 대호군 부정으로 통정대부가 됐다. 귀향 후 사패 지를 하사받았고 마을 이름도 재말榟村이라 불리게 됐다. 묘는 포승읍 신영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정암李廷馣(1541∼1600)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이다. 방혜동 경주이씨 문중의 향조인 오재悟齊공 사직서령 탕宕의 차남이며 이조참판 정형廷馨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65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 성균관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했다.
1569년 경기도 도사로 옮겼다가 경직인 춘추관 기주관이 됐고, 이듬해에는 형조 좌랑에 재임용돼 지제교를 겸했으며 다시 병조정랑으로 전직해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파견돼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을 역임했다. 1571년 예조정랑·사헌부 지평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고 『명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으며 경기도 경차관으로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다음해에 양주 목사로 나가 도봉서원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해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92년 임진왜란때 이조 참의로 있었는데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하자 뒤늦게 호종했으나, 이미 체직돼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 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했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돼 의병을 모집해 연안성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 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해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해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됐다.
1593년 병조참판·전주 부윤·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 충청도 관찰사가 돼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됐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됐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 초토사로 해주의 수양산성을 지키기도 했다. 난이 끝나자 풍덕豊德에 은거해 시문으로 소일했다. 1604년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2등에 책록됐으며, 월천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됐다. 성혼·이제신 등과 교유했다. 연안 현충사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 『독역고讀易攷』, 『왜변록倭變錄』, 『서정일록西征日錄』, 『사류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정암, 이장희 편 『서정일록』, 플러스예감, 2006.
이장희, 『임진해선의병에 관한 일고찰 : 연안대첩을 중심으로』, 고려대 사학회, 1969
이정함李廷鋡(1534~1599) 문신
자는 백훈伯薰, 시호는 퇴제退齊이다. 1558년 진사에 참방돼 삼례 찰방을 지냈다. 후일동생인 정암廷馣·정형廷馨으로 인해 이조 참판 증직을 받았다. 방혜동 경주이씨 문중인이 며, 묘는 장안리(부락산 남쪽 기슭)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종배李鐘培(1834∼1878)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문오文五이다. 1862년(철종 13) 무과에 급제해 선전광 용양위부사과 龍驤衛部司果·내금위·사과·수문장守門將 등을 역임했다. 묘는 부인 고령신씨와 계배系配 죽산 안씨와 안중읍 학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종식李鐘植(1832∼1889)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성전聖全이다. 1861년(철종 12)에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사과訓練阮 司果, 부위우부장副尉右部長, 구례현감求禮縣監, 1865년 오위장五衛將 등을 역임했다. 묘는 숙부인 김해김씨와 함께 포승읍 희곡리 죽곡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종원李鍾元(1823∼1870)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은경銀卿이다. 1845년(을사년)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 및 훈 련첨정訓練僉正을 거쳐 1864년 희천군수熙川郡守, 1866년 전라병우후全羅兵虞侯를 역임했다. 1867년 동진첨사東津僉使 재직 시 동진에 홍수가 났을 때 동진진東津鎭의 관청 건물과 성첩 城堞을 5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준공한 공功으로 방어사防禦使로 승차陞差했다. 1868년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역임했다. 묘는 현덕면 화양리에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
이종하李鐘夏(1826∼1880)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시백時伯이다. 1849년(헌종 15)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 훈련원첨정 訓練院僉正을 지냈다. 묘는 현덕면 화양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지강李之剛(1362∼1427) 문신
본관은 광주, 자는 중잠仲潛이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의 아들이다. 임술년에 과거에 올라 의정부 사인과 사헌부 장령이 됐다. 이후 한성 부윤·경상도 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평안도감사·예조판서·의정부참판 겸 대사헌을 역임하고 중군도출제로 65세에 관직을 떠났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천성이 청렴하고 간략해 이르는 곳마다 성망聲望과 공적功績이 있었으나 후손이 없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진한李振漢(1645∼1698) 문신
본관은 함평, 자는 무경懋卿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예에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다. 관직에 올라 통정대부에 오르고 훈융진병마절제사 등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홍원3리에 배위와 합영 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진해李振海(1656∼1728)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군익君益이다. 무과에 급제해 1682년 부장部將, 1685년 군자주부軍資主簿, 1686년 감찰, 동년 흥덕현감 등을 역임했다. 1689년 울산감목관, 1703년 홍원현감을 제수 받았다. 홍원현감 재임 시 잘못해 파면됐다가 사면을 받았다. 이후 1708년 함흥감목관 1722년 부호군이 됐다. 묘는 참의공조 좌간좌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창신李彰愼(1770∼1842)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현지顯之이다. 1800년 무과에 급제했다. 내금위內禁衛를 거쳐 무겸 1813년 훈련주부 등을 역임했고, 1829년 강진현감康津縣監을 제수받았다. 강진현감 재임 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청백리로 덕성이 널리 알려져 숭배를 받았다. 묘는 포승읍 도곡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천근李天根(1645∼1718) 무신
본관은 광주, 자는 여강汝强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등과했다. 1676년 부사과를 시작으로 1680년 첨정僉正 훈련도총 경력, 1681년 박천군수, 1684년 고부군수가 됐다. 1688년 경상우병우후, 가덕첨사를 거쳐 1697년 철원부사를 역임했다. 1699년 내금위장, 춘천부사, 1703년 양주목사, 1705년 경상무병사, 1709년 정주목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715년 훈련도정訓練都正, 황해병사黃海兵使를 지냈다. 묘는 진위면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진위읍지』
이태좌李台佐(1660∼1739)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이다. 영의정 항복恒福의 현손으로 참판 세필世弼의 아들이며, 영의정 광좌光佐의 재종형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에 올랐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701년 지평으로 서 이세석의 과거시험 부정을 탄핵했으나 왕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의 사사에 적 극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이명세를 신구하다가 도리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선산으로 유배당했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에 등용되고, 사서·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2월 문학으로서 필선 유태명과 함께 경상좌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으며, 이어 부교리·이조정랑·부수찬· 집의·응교를 거쳐 1708년 12월 강원도 관찰사가 됐다. 이조참의·대사성·대사간·승 지·강화 유수를 역임하고, 1716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윤선거 문제를 논하다가 노론일색 인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으나 곧 경기 관찰사에 임명됐다. 1721년(경종 1) 다시 강 화부 유수에 재임되고 동지의금부사, 형조·예조·호조 판서를 역임했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로 삭직 당했으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호조 판서·병조 판서·이조 판서를 거쳤고, 이듬해에는 우의정, 1729년 좌의정·판중추부사로 전직됐다 가 1736년에 봉조하奉朝賀가 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묘는 진위면 동천리 산능 선영이 고 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한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이태홍李泰弘(1670∼1746) 무신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정사공신 완흥군 원영의 적손嫡孫이다. 1716년 선략 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을 제수 받았고, 1720년 어모장군 충좌위부사용·부사과·부사정 등을 지냈다. 묘는 현덕면 덕목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교지>
이해李楷(1584∼1642) 무신
본관은 함평, 자는 경즉景則이다. 시조 언彦의 16세손이며 진사공파조 성근成根의 6세손 이다. 무과에 급제해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됐고 장단부사를 지냈다. 묘는 포승읍 내기리(정문동)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행규李行奎(1809∼1875) 무신
본관은 평창, 자는 운로雲路이다. 1837년(헌종 3)에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시작으로 1854년에 강진현감康津縣監을 지냈다. 절충장군으로 승차하여 훈련첨정, 신광첨사申光僉使 등을 역임했다. 묘는 숙부인淑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와 함께 안중읍 학현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이홍림李弘林(1669∼?) 문신
본관은 전주. 모곡동 전주이씨 입향조 헌방의 5세손이다. 1750년 82세의 나이로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고, 다음해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을 받았다. 묘는 송탄동 하가재마을 뒷산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인홍계印弘契(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교동. 중시조인 당璫의 12세손으로 1704년(숙종 30) 갑신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行龍驤衛 부호군으로 벼슬이 이르렀고 관직을 해임한 후 한양도성으로부터 수원부 광덕현(현 현덕면 대안리 학진)으로 낙향한 후로는 덕망과 선행으로 주민으로부터 송덕頌德을 받았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장우張羽(생몰미상) 문신
덕수 장씨張氏의 시조인 공숙공恭肅公의 증손. 송도 개경 출생이나 태조 때 팽성읍 석근리로 이주해왔다. 아호雅號가 두촌杜村이다. 고려 때 예부의랑禮部議郞의 벼슬을 지냈고 조선 개국 후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올라 예악禮樂을 일으키게 했다. 벼슬이 자헌대부·행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다. 묘는 팽성읍 노양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정담수鄭聃壽(1550∼1604) 무신
본관은 해주, 자는 덕수德叟, 호는 운대雲臺이다. 팽성읍 근내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 (선조 16)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이어 전라도 어란만호全羅道於蘭萬戶가 됐 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좌선봉응양장左先鋒鷹揚將돼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 장섰다. 첨지중추부사 겸 훈련원첨정을 지냈다. 난이 끝난 후 고향인 평택으로 낙향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묘는 팽성읍 근내리 오마산에 있다.
참고문헌 : 『별씨방목』
정도전鄭道傳(1342∼1398) 문신
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 시호는 문헌文憲, 형부상서 운경의 아들이다. 이 색의 문인,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 이듬해에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주부典校主簿,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1370년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됐다. 이듬해 예조정랑 禮曹正郞 겸 성균관태상박사成均館太常博士가 됐다. 1375년(우왕 1)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예문관응교藝文館應校,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 의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을 반대하다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됐다. 2년 후 풀려 나와 후진들 을 양성하다가 1383년 동북면지휘사東北面指揮使 이성계의 참모가 됐고 이듬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와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승진, 1388 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진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이성계의 우익으로 지공거知貢擧,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했다. 조준趙浚의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단행토록 건의하고 억불抑佛을 주장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탄핵, 유배되게 해 조선개국의 정지작업을 시작했다. 이 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이듬해 이성계, 조준, 심덕부 등과 함께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해 강화에 추방, 공양왕을 추대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돼 봉화현 충의군에 봉해진 뒤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1)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낸 뒤 성절사聖節使 겸 변 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무고를 밝히고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겸 성균관대사성,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겸 대사헌大司憲,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했다. 이성계가 군사권을 잡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됐다. 구세력의 득세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봉화에 유배됐다가 뒤에 풀 려나 복직됐고 조준, 남은南誾 등과 이성계를 추대, 조선건국 후 개국공신 일등으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돼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394년(태조 3) 한양천도를 주장해 실현했다. 이듬해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撰進했고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돼 성을 수축하고 병참兵站을 신설했으며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가 됐다. 이듬해 명나라에서 정조사가 올린 표전문表箋文이 잘못 됐다해 기초자起草者를 잡아 오라 하자 그는 명나라와 실력으로 항쟁할 것을 주장 군사의 훈련, 군량미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에 세자 방석芳碩을 옹호하고 정실 소생의 왕자를 죽이려 한다는 누명을 써 남은 등과 함께 방원芳遠(태종)에게 참수斬首됐다. 유학의 대가로 조선개국 후 군사·외교·성리학·역사·행정·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초기의 건국 작업에 활약했으며 배불숭유排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해 유학발전을 기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한영우, 『정도전 사상의 연구』, 일지사, 1973.
한영우,『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2011.
최상용, 박홍규, 『정치가 정도전』, 2007.
정동망鄭東望(1617∼1689) 문신
본관은 봉화, 내자시 직장 점漸의 둘째 아들로 진위면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국천國天, 현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산101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정동준鄭東俊(1595∼1674) 무관
본관은 봉화. 제용감정 잠潛의 장자로 은산리에서 출생했다. 자는 영보英甫,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 훈련부정訓練副正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묘는 원곡면 산하리 171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정래鄭來(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봉화. 조선개국 원종공신 정진鄭津의 장자로 태어나 조선조 태종 때 선무랑宣務郞에 올랐다. 한성판관을 지낸 뒤 처인현령處仁縣令(현 용인시 처인구지역)으로 있던 1411년(태종 11) 7월에 조부祖父 정도전을 삭탈관직하고 폐서인하며, 자손을 금고禁錮했다. 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진위면 은산리로 은거했다. 1416년 7월 금고에서 풀려났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냄으로서 평택의 봉화정씨 입향조가 됐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 산25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정속鄭束(생몰미상) 문신
본관은 봉화. 조선개국 원종공신 정진鄭津의 차자로 태어났다. 1411년(태종 11) 7월에 조 부 삼봉 정도전을 삭탈관직하고 폐서인하고, 자손들을 금고禁錮했다. 이때 처인현령處仁縣令으로 있던 형 래來와 함께 은거해 은산리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이후 1416년 7월에 금고에서 풀려나고, 1425년 혼인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후일 정승과 부정副正을 지냈다. 1431년(세종 13) 5월 2일에 진위현감으로 사조辭朝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경기에는 밀·보리가 좀 잘됐다고 하던데, 가뭄이 지금 시작되니 매우 염려된다. 하늘의 뜻을 사람이 돌이킬 수는 없으나,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라” 했다. 이 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됐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123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정연鄭璉(1653∼1731) 무관
본관은 봉화. 첨지중추부사 동망東望의 둘째 아들로 진위 은산리에 태어났다. 자는 여훈 汝勳이고, 숙종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묘는 안성시 양성면 방축리 산87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정응고鄭應皐(1825∼1904)
본관은 봉화. 통정대부 의진義鎭의 장자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고敬臯이며, 고 종 때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는 진위면 은산리에 있다.
참고문헌 : 『봉화정씨대동보』
정응기鄭應夔(1832∼1906) 문신
본관은 봉화, 자는 이선以善, 호는 춘파春播이다. 1870년(고종 7)에 삼봉선생의 봉사손奉嗣孫으로 천거됐다.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경모궁령敬慕宮令, 경릉령敬陵令, 내무주사內務主事, 제중원주사濟衆院主事, 남서부령南西部令,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창릉령昌陵令, 장릉령章陵令 등을 거쳐 통훈 대부通訓大夫에 가좌돼 행사직서行社稷署을 역임했다. 한말에 외척이 발호하고, 외세를 등 에 업은 간신들이 이 땅을 유린하자 낙향한 뒤 은산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안성시 원 곡면 산하리 산72-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정응설鄭應卨(1869∼1912) 문신
본관은 봉화, 자는 수경壽卿, 호는 삼운三雲이다. 현감 영진永鎭의 장자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고종 때 통훈대부 중추원의관에 올랐으며, 화성 장터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유세 도중 암살됐다. 시신을 고향인 은산리로 운구할 때 전국에서 답지한 만장이 이십여 리를 가득 메웠다고 전한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가천리에 있다.
참고문헌 : 『봉화정씨대동보』
정응설鄭應設(1830∼1916)
본관은 봉화, 자는 상지商之이다. 통정대부 의진義鎭의 3자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고종 때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중추원의관에 올랐으며, 가선대부에 증직됐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가천리에 있다.
참고문헌 : 『봉화정씨대동보』
정의진鄭義鎭(1796∼1853)
본관은 봉화. 동몽교관 치범致範의 아들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고종 때 효행으로 증贈 통정대부예식원좌장通政大夫禮式院左掌을 받았다. 묘는 진위면 은산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정인창鄭隣昌(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봉화. 의흥위후부장義興衛後府將을 지낸 백종伯宗의 장자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경상우도우후慶尙右道虞候를 지냈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 산17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정인형鄭仁炯(1448∼1494)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부는 직산현감 증 영의정인 속束이고, 모는 경주이씨이다. 자는 형숙亨淑, 호는 한수漢叟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형제兄弟가 은산리에 살고 있던 종백부從伯父 래來에 의지해 학업을 연마했으며, 형은 문과 후 우의정을 역임한 문형이다. 1465년(세조 12) 문과에 급제해 1468년(세조 14) 4월에 사헌부감찰로 보임된 후 영남지방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관리들의 ‘민간공세의 경제대납’과 ‘감옥죄수들의 판결지연’, ‘수령, 만호들의 탐오’, ‘함부로 형벌을 가하는 일’, ‘역마를 함부로 타는 일’, ‘불법으로 백성을 부리는 일’, ‘백성의 청원심리불이행’ 등 일곱 가지 사목事目을 규찰했으며, 만일 “은휘隱諱한 것이 있는 자 는 당상堂上·의친議親·공신功臣이면 계문啓聞한 뒤에 추국推鞫하게 하고, 3품品 이하이면 직단直斷하라는 특명을 수행했다. 다음해(1469) 1월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된 뒤 다음해 12월 에 임금이 아마兒馬 1필을 내려 주었고, 그후 호남을 순찰한 뒤 정원에 아마兒馬 1필을 또 받았다. 외직으로 진위현령과 군수 등을 역임한 후 통정대부 행 군기사부정軍器寺副正을 지 냈다. 묘는 진위면 은산리 기동에 부인과 합장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정잠鄭潛(1573∼1635) 문신
본관은 봉화. 군자감 참봉 세의世義의 장자로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통정대부 通政大夫로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산하리 산17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정진鄭津(1361∼1427)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개국공신 도전道傳의 아들이다. 1382년(우왕 8) 낭장이 되고 사재령· 전농령을 지냈다. 1391년(공민왕 3) 정몽주 등 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그 의 아버지인 도전과 함께 삭직됐다가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와 개국공 신의 아들로서 연안부사로 등용됐다. 1393년 판사재감사를 거쳐 경흥부윤·영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전서와 형조전서를 지냈다. 1398년 중추원부사 로 있을 때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 도전이 주살되자 그도 벼슬을 삭직당 해 전라도 수군에 충군됐다. 1407년(태종 7) 다시 판나주목사로 기용되고 1416년 인녕부 윤이 돼 크게 치적을 올렸다. 1419년(세종 1) 충청도 관찰사가 됐다가 1420년 판한성부사 가 됐다. 그해 성절사聖節使가 돼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관찰사가 됐다. 1423년 공조판 서를 역임하고 1424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됐으며 1425년 형조판서가 됐다. 그의 아버지 도전의 후광을 받아 조선 개국 초에는 한때 한려한 직책에 중용됐으나 왕자의 난으로 도전이 몰려 주살되자 일개 수군으로 전락돼 모진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성실한 인품이 인정돼 다시 등용돼 재상의 영직榮職을 누렸다. 시호는 희절僖節이다. 묘는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었으나 진위면 은산리로 이장 됐다.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여지도서』, 『삼봉집』, 『양촌집』, 『동문선』, 『국조방목』,『CD-ROM 사마방목』, 『봉화정씨대동보』
조광조趙光祖(1482∼1519)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한성 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이충동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7세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됐다. 그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됐고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됐다.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했다. 정언이 돼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했다.
1518년 부제학이 돼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문斯文의 흉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혁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 중 홍경주·남곤·심정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 하도록 했다. 궁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했다.
왕이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투옥됐다. 처음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됐다.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해 그해 12월에 사사됐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선조 초 신원伸寃돼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사당과 서원도 설립됐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봉안됐으며, 1605년에는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책策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과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묘는 용인시 수지면 상현리에 있다. 1585년(선조 18)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명은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썼으며 김응남이 전액篆額했는데 용인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이충동에는 조광조를 기리는 ‘충의각’이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이상성,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심산, 2003.
이상성,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 성대출판부, 2011.
조방정趙邦楨(1602∼1670)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여후汝厚이고, 시호는 휴암休岩이다. 1602년(선조 35) 출생했고 시조 지수공의 15대 손이며, 한천부원군 온溫의 10세손으로 택澤의 장자이다. 인조 8년 음관으 로 사복시의 판관을 제수 받았고 또한 무과에 올라 부호군으로서 효종 시 북벌계획에 참여 해 많은 강병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1660년 효종대왕의 승하로 북진이 좌절됐고, 1665 년 판결사에 올랐다. 1668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방한趙邦翰(1604∼1665) 문신
본관은 한양. 1604년(선조 37) 갑진년에 대사간 조택趙澤의 차자로 출생했다. 어렸을 때 부터 청명해 많은 학문에 능통했고 조봉대부로 직장을 역임했다. 묘는 안중면 학현리 야미동夜味洞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병도趙炳道(1604∼1665)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중혁重赫이다. 대사간 조택趙澤의 10대손으로 1806년(순조 6) 병인 년에 평택에서 출생했다. 1827년 초시인 생원과에 합격했고 1836년(헌종 2) 진사과에 합 격했다. 1882년(고종 19)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겸 오위장으로 벼슬이 올랐으며 이어 1884년에 가선대부, 용양위 호군에 올랐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 삼성산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조빈趙彬(1677∼1735)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화백華伯이다. 대사간 조택趙澤의 고손으로 1677년(현종 14)에 출생했 다. 1712년(숙종 38) 임진년에 훈련원봉사로 입사入仕했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일趙佾(1652∼1704) 문신
본관은 한양. 대사간인 조택趙澤의 손으로 1636년(인조 14) 고향인 오성면 죽리에서 출생 했다. 1672년(현종 13) 등과하고 참봉에 제수됐다. 묘는 오성면 대죽동 묘봉卯峯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전趙佺(1631∼1678) 문신
본관은 한양. 대사간 조택의 손으로 1631년(인조 9) 고향인 오성면 죽리에서 출생했고, 1663년(현종 4)에 참봉을 제수 받았다. 묘는 오성면 죽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종명趙鍾明(1819∼1879)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원서元瑞이다. 시조공 지수之壽의 22세손이며, 중시조인 참판공의 15세손으로 원철元喆의 아들이다. 오성면 죽리에서 성장하고 어렸을 때부터 한학에 능통한 재질이 있어 임오년 2월 22일 왕세자 가례 후 5월 29일 시행한 증광시 과거에 그의 아우 종현과 같이 합격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진걸趙震傑(1675∼1732)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군보群甫이다. 1675년(숙종 1) 고향인 오성면 죽리에서 출생했고, 1699년 진사과에 합격했다. 1708년(숙종 34) 통덕랑에 올랐다. 묘는 오성면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진욱趙震郁(1677∼1735)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문향文鄕이다. 1677년(숙종 3)에 대사간 조택趙澤의 증손으로 출생하고, 1699년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709년 통덕랑에 올랐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조진창趙震昌(1654∼1706) 문신
본관은 한양. 대사간 조택趙澤의 증손으로 1655년(효종 6) 고향인 오성면 죽리에서 출생했다. 1698년(숙종 28) 입사入仕하고 직장直長에 배수拜授됐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진필趙震弼(1652∼1704)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여상汝相이다. 대사간 조택의 증손으로 1652년(효종 3) 고향인 오성면 죽리에서 출생했다. 1693년(숙종 19) 임관하고 사직령을 제수 받았다. 묘는 오성면 죽리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조택趙澤(1580∼?)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중청仲淸, 시호는 죽하竹下이다. 1580년(선조 13) 한양에서 아버지인 첨추공僉樞公 대용大容의 아들로 출생했다. 21세에 음관蔭官으로 이조좌랑에 오르고 정언과 교리 등을 거쳐 사예보덕司藝補德과 사간 그리고 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했고 1647년(인조 25) 오성면 죽리 대죽동으로 낙향해 많 은 후학을 양성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하행趙夏行(1851∼1910)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선녀善汝이다. 1830년(순조 30) 병인년 생으로 1851년(철종 2) 생원시 에 합격했고 1862년 임술년에 대과에 급제했다. 1902년(고종 39)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 고 1907년(순종 1) 국운의 쇠퇴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평택으로 낙향해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묘는 오성면 대죽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조현趙俔(1624∼1674)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반숙盤叔이다. 1634년(인조 12) 갑술년에 오성면 죽리에서 태어났다. 1663년 등과해 조산대부 사복원 주부에 올랐다. 묘는 오성면 금곡리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지응학池應鶴(1591∼1623) 문신
자는 붕거鵬擧. 시조공 지경池鏡의 25세손이며 중시조인 윤원尹源의 4세손이다. 1591년 (선조 24)생으로 1621년(광해군 13) 별장으로 등관해 인동부사에 이르고 선무연훈에 책록 됐다. 묘는 오성면 대반리 용두동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진만옥陣萬玉(1831∼1907) 무신
동몽교관 진동형의 아들로 1885년 선략장군 행충무위부사, 충훈부사, 장사랑도사 등의 제수를 받았다. 묘는 현덕면 덕목리 광성산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최경崔徑
본관은 수성. 시조 영규永奎의 5세손이다. 조선조 출사해 사정司正을 지냈다. 그의 아들 유림이 공신이 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고 수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안양安讓이라는 시호를 받고 수성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증직됐다. 평택 수성최씨의 입향조이다. 묘는 도일동 산10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최경숙崔慶俶
본관은 수성, 자는 길초吉初, 최충국崔忠國의 장남이다. 벼슬은 통훈대부 행 사옹원판관通訓大夫 行 司饔院判官 이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최기익崔基益(1827∼1912)
본관은 수성, 자는 인겸仁謙, 최원영崔元榮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백가지서에 통달했다. 특히 삼강행실의 근본이 투철해 범백사에 놀라운 학문적 지식을 보여줌으로써 인근 세평이 대단했다. 진위군 유림에서 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추천돼 교관을 봉직하면서 10여 년간 활동했는데 사재를 들여 성역을 보수하고 유도의 보급에 힘썼으며, 벼슬은 1902년 정3품 통정대부로 제수되고 1904년에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칙명>, 『평택군지』, 『송탄시사』
최명호崔命鎬(1796∼1859)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주향周鄕이다. 아버지는 립笠이고 어머니는 평창이씨다. 1815년(순조 15)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과 전라우후, 경상진주 병무우후 등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도곡리 무수리 선산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최명후崔鳴後(1609∼미상)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명지明之, 부는 인수麟壽이다. 1637년(인조 15) 정축 별시 병과에 급제했다. 1637년 선전관과 초관을 거쳐 1653년 덕천군수를 역임했다. 1656년 충청병우후 1658년 곽산군수를 거쳐 1661년 경흥부사를 제수받았다. 묘는 송탄동(방혜마을)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사마방목』, 『승정원일기』
최보한崔輔漢(?∼1546) 문신
본관은 수성, 자는 언경彦卿이다. 아버지는 윤명潤明이며, 어머니는 이의석李宜碩의 딸이 다. 1524년(중종 19) 생원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이 됐고, 1527년 이 문전시吏文殿試에 급제한 뒤 문반으로 직을 옮겼다. 1533년 사간원 정원이 됐는데 이 때 당 하관의 각촉부시刻燭賦詩에서 차석을 해 왕으로부터 조궁造弓을 하사받았다. 1537년 지평 사간원 헌납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간 김안로金安老를 제거하고 일당을 축출하는 데 앞 장섰다. 이어 응교·전한·사인舍人 등을 거쳐 1539년 부제학을 지내고 1540년 사헌부 대 사헌이 됐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사간원 대사관·한성부우윤·형조참 판·전라도 관찰사·한성부 좌윤을 거쳐 1543년 이조참판·예조참판·호조참판을 두루 역임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의 족질로서 대윤大尹 일당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추성협익 정난위사 공신으로 책록되고 수산군에 봉해졌으며 가선대부에 올랐 다. 1546년 우찬성으로 승직됐다. 묘는 도일동 110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최사순崔士恂(1578∼1627)
본관은 수성, 자는 여성汝誠, 최경숙崔慶淑의 장남이다. 문과 생원生員에 급제 어모장군 행 충좌위부사용禦侮將軍 行 忠佐衛副司勇을 역임하고 1708년(강희 47) 통훈대부 사복시정通 訓大夫 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됐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수성최씨대동보』
최상후崔尙厚(1712∼1802)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재원載元이다. 부는 보신保身이고 모는 영천이씨다. 1736년(영조 12) 에 무과에 급제했다. 1749년 수문장 1754년 도총도사를 거쳐 1756년 충주부 경력 전라 좌 수사를 역임했고 1757년 부호군이 됐다. 1772년 강령현감康翎縣監을 지냈다. 묘는 포승읍 도곡리 선산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석윤崔錫胤(1678∼1746)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윤지胤之다. 부는 태망泰望이고 모는 해주오씨이다. 1717년 무과에 급제했다. 1724년 선전관을 거쳐 1925년 훈련판관, 도총도사, 훈련첨정을 역임했고 1726년 충주경력·도총경력 1728년 고산리 첨사 1734년 파총이 됐다. 1736년 훈련도감파총, 1739년 부호군이 됐다. 묘는 포승읍 재촌 승배산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성윤崔聖胤(1644∼1718)
본관은 수성, 호는 무수옹無愁翁이다. 시조 문헌공의 12세손이고 가산공의 7세손으로 형조참의 치망致望의 아들이다. 조선 인조 갑신생으로 도덕군자의 명문대가의 선비 가통을 계승하고 성장해왔다. 그는 선비의 나갈 길은 곧 입신양명만이 아니라 산림에 은거해 자손들을 잘 교도하고 신명을 잘 보존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또 부모님 봉양에도 온갖 효성을 다하고 동기일신同氣一身의 돈목敦睦을 늘 강조하는 사상이 깊어 그의 정신을 자타가 칭송해왔다. 또한 학문적인 문장에도 출중해 당대의 명인 서파西坡 오도일吳道日의 추천으로 감역의 벼슬이 제수되나 이를 거절하고 산간에 은거하면서 휴학의 인도에만 정진했다. 그로 인해 덕망이 사해四海에 떨치고 그의 제자와 유림에서는 그를 일민逸民이라 논해왔다. 사림에서는 그가 묻힌 포승면 도곡리를 공의 아호 무수자無愁字를 따라서 동명을 무수시라 칭하고 있다. 오늘날 포승읍 무수동명은 그의 유택과 함께 유래되고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최수성崔壽城(1487∼1521)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蒲山人, 시호는 문정文正,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이다. 8세에 진위현에 이주해 학업에 정진했고, 9세 때 주변에서 문예에 뛰어나 칭찬을 받았으나 학문의 탐구열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9세에는 명산대찰을 두루 살피며 야인으로 경륜만 쌓아 나갔다. 또 김굉필의 문하에 들어 수학하면서, 정암 조광조·김정金淨 등과 교유했다. 한때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것에서 연유했다. 연산군 때에 이르러 세상을 멀리하고 진위현 원산猿山에 원정猿亭을 짓고 주변의 선비들과 시론하며 지냈다. 중종반정 이후 정암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의 득세가 있음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결국 은유 자적하던 그는 신사무옥에 의해 진위현 향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때 천재지변이 일어나 죽음을 하늘이 애통해 했다는 설화도 구전되고 있다. 1540년(중종 35) 누명을 벗어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 의정에 추증됐다. 선조는 그의 묘가 있는 당시 진위현 이탄면의 원산주변 마을에 부역을 면제해주고 묘를 정성껏 돌보게 했다 한다.
참고문헌 : 『송탄시사』,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최언호崔彦浩(1506∼1566)
본관은 수성, 자는 호연浩然, 윤종의 둘째 아들이다. 문과에 등과해 직장 및 충훈부 도사 를 역임하고 1537년 충순위에 들어갔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1545년(명종 즉위원 년)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3등에 봉해졌다. 이어 사복시 주부가 됐다. 1547년 추성정난위사공신 조봉대부 선공감첨정을 거쳐 충훈부 경력이 됐다. 1549년 수원도호부 사, 1551년 내승을 거쳐 병조참의, 동부승지,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했다. 묘는 가재 동 산53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최영숙崔榮淑(1555∼1623)
본관은 수성, 자는 현초顯初, 최충국崔忠國의 차남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 진사進士에 급제했고, 통훈대부장락원정 행 삼등현령 겸 성천진관병마절제사通訓大夫掌樂院正 行 三登縣 令 兼 成川鎭管兵馬節制使를 역임했다. 묘는 지산동에 있다.
참고문헌 : 『사마방목』
최원영崔元榮(1802∼1840)
본관은 수성, 자는 중선仲善, 최재崔梓의 아들이다. 1827년 무과에 급제하고 총리영별군 관摠理營別軍官을 역임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증직됐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 지에 있다.
참고문헌 : <칙명>
최유림崔有臨(1426∼1471)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자앙子昻, 최경崔徑의 장남이다.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고 1455년 세조의 즉위에 공이 있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녹훈錄勳 됐으며 1464년(세조 10)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하사進賀使가 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전라도 처치사全羅 道處置使로 제수除授 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돼 충청도 병사 1,000명을 이끌고 석장현石場峴 싸움에서 적장 김말손金末孫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훈호勳號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수성군隋城君에 봉하는 동시에 오위장五衛將이 됐다. 그 해 명나라의 북방을 침범한 이만주의 군대를 막기 위해 조선지원군의 출병 시 큰 공을 세움으로써 1468년(세조 14)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역임歷任했다. 1471년(성종 2)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내려와 8월 28일 타계하니 성종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해 치장治葬케 했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曺判書로 추증追贈하고 안양安襄으로 시호諡號를 내렸다. 배는 정부인 진산소씨貞夫人 晉山蘇氏이고, 불천위不遷位 사우祠宇는 평택시 오좌동에 있으며 수성최씨隋城崔氏 수성군파隋城君派의 세거지지世居之地로 내려오고 있다. 묘는 지산동(우곡마을) 산106-2에 있고, 묘 및 사우는 평택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최유용崔有容(생몰미상) 무신
본관은 수성. 최경의 차남으로 무과에 급제해 1467년 태천군수, 가산군수를 역임했다.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추증 받았다. 묘는 도일동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최윤신崔潤身(생몰미상) 유학자
본관은 수성, 호는 극기재克己齋, 최유림崔有臨의 아들이다. 1469년 기축증광시에 진사, 생원 양시에 급제했다. 1477년 의금부 경력 1480년 도사에 이어 1483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내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며, 성둔옹成遯翁, 안사재安思齋 등의 유학자와 교류하고 지냈다. 진위현 관사를 건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증직은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 吏曹參議이다. 묘는 지산동(우곡마을) 산106-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최응수(생몰미상)
진위향교 아래서 살았는데 병자호란 때 적이 향교에 들어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때 앞장서 들어가 위판位版을 지키고 나와 깨끗한 곳에 보관했다. 난리가 끝난 후 두어 칸을 지어 위판을 봉안했다. 교궁校宮에서 쓰던 번포番布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평택시사』
최의윤崔義允(1856∼1914) 무신
자는 보경保經. 오성면 죽리에서 종명種明의 자로 태어났다. 1889년(고종 26)에 통덕랑, 의금부도사의 교지를 받고 1891년에는 선략장군 행용양위부사에 올랐다. 묘는 오성면 죽 리 삼정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최인건崔仁建(1578∼?)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대립大立이다. 부는 광규光奎이고 모는 남원윤씨다. 1629년(인조 7) 사 헌부 감찰을 거쳐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역임했다. 묘는 포승읍 도곡리 무수리산 선조 북쪽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자반崔子伴(생몰미상)
본관은 수성, 호는 망고望皐, 최윤신崔潤身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강직해 많은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학문을 좋아해서 김모재金慕齋와 안국安國 형제 그리고 백휴암白休庵 등 인걸과 교분하면서 지고至高한 학문을 닦았다. 강릉최씨 진위파의 최수성(강릉에서 태어났으나 진위현은 외가)과 평택지역의 조광조·우남양 등과도 교류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자연을 벗 삼으며 부모님 봉양에 진력을 다하는 중에 갑자기 부친상을 당해 진위현 우곡동에 산소를 모시고 그 곳에서 시묘살이를 6년 동안 지냈다. “우막 앞에 샘을 파니 샘물이 용출했으며, 어느 날 한질寒疾이 나는데 꿈에 한 노인이 환약 3개를 주어 그것을 복용하고 효험을 보았고, 우막 근처에 뱀과 개미가 많았어도 시묘하는 중에는 전혀 접근치 않았으며, 우막 근처에 학 한 쌍이 오래된 소나무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상을 마치 고 귀가한 이후에 그 학도 슬피 울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광경 을 목격한 동리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낳은 큰 효자라고 극찬하고, 또한 나무를 사랑해 은 행나무·향나무·팽이나무 등 수십 주를 생전에 식수했으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거의 고사되고 지금은 은행나무 2주와 향나무 2주가 성장해 거목이 돼서 후손들이 보존 관리해 오고 있다.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용성군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 知義禁府事 龍城君이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송탄시사』
최전발崔雋發(1599∼1642)
본관은 수성, 자는 기장起長, 최사순崔士恂의 장남이다. 어모장군 행 충좌위부사용禦侮將軍 行 忠佐衛副司勇이고 1708년(강희 47)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로 증직됐다.
참고문헌 : <교지>, 『수성최씨대동보』
최정崔定(1702∼1748)
본관은 수성, 자는 중소中昭이다. 부는 최춘대崔春大, 조는 최진한崔鎭漢, 증조曾祖는 최형운崔亨運이다. 1720년(경종 원년) 무과에 급제했으며 벼슬이 1725년 사포별제司圃別提, 1730년 통정대부 행 전주판관通政大夫 行 全州判官, 1732년 좌변포도종사관左邊捕盜從事官, 1734년 상원군수祥原郡守를 역임했고, 1745년 덕천군수에 제수됐다. 묘는 지산동에서 안성시 원곡면 산내리 산150-1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정현崔廷顯(1611∼?)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공달公達이다. 부는 인건仁建이고 모는 전주이씨다. 1633년(인조 11) 무과에 급제했다. 1937년 병자호란 시 선전관으로 소현세자의 익찬翊贊을 겸해 청나라 심양까지 수행 보호하고 있다가 환국한 후 1648년 훈련원첨정, 1649년 겸 내승을 거쳐 덕천군수를 역임했다. 1653년 덕원부사, 1656년 나주영장, 1657년 오위장·장흥현감 등을 했고 1658년 명천부사를 한 후 1658년 호군이 돼 죽산 부사를 했다. 이듬해 전남 우병사, 전남 좌수사를 역임했고, 1662년 평해 군수, 1671년 태안군수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묘는 포승읍 무수리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진원崔鎭遠(1666∼1711)
본관은 수성, 자는 덕수德綏, 최창운崔昌運의 아들이다. 벼슬은 교봉직랑敎奉直郎에서 통덕랑通德郞이 됐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수성최씨대동보』
최진창崔震昌(1622∼?)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달부達夫이다. 부는 영후榮後이고 모는 창녕성씨이다. 1651년(효종 2) 신묘년에 별시 별과에 급제했다. 1658년 도총도사 및 파총을 거쳐 1666년 위원군수渭原郡守, 1674년 순천군수, 1678년 울진현령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신묘발시문무과방목』, 『진위읍지』
최진한崔鎭漢(1652∼1740)
본관은 수성, 자는 천경天擎, 1652년 평택시 독곡동 오좌마을에서 최형운崔亨運의 장남으 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혜聰慧가 절륜하고 얼굴이 관옥冠玉 같으니 동료 중에 나가면 완연히 닭의 무리에 봉鳳이 선 것과 흡사했으며 학업에 나간 후 학문이 일취해 칭송이 자 자했다.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경상우도병마절 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돼 왕이 하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 임금에게 충성하 는 자 가도를 바르게 하는 자는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이다. 아무쪼록 군무에 근실하고 민 정을 잘 살펴서 너의 선조 안양공의 유법을 잘 이어가라, 그리고 남해는 중요한 땅이라 임 지에 가서 힘쓸지어다”라고 했다. 명을 받고 부임해 장졸을 훈련케 하고 진용을 엄숙히 했 으며 민정을 살펴 농상을 권장하며 효제로 인도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군졸에게 포백을 주 어서 그 직무에 충실토록 하고 백성은 그 직업에 근면勤勉해 일경一更이 안도安堵했다. 집 에서도 효제지행의 모범이 되고 청렴결백하다는 소문이 조정에도 알게 돼 왕명으로 특별 히 금위아장禁衛亞將으로 제수했다. 그 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 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됐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산내리 산150-1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진위읍지』
최창운崔昌運(1624∼1692)
본관은 수성, 자는 응휴應休, 최전발崔雋發의 장남이다. 1643년(인조 21) 무과武科에 급제 하고 1660년 어모장군 행 용양위부사과禦侮將軍 行 龍驤 衛副司果, 1664년 어모장군 무신겸 선전관禦侮將軍 武臣兼宣傳官, 1668년 어모장군 행 노강진 수군첨절제사禦侮將軍 行 老江鎭 水 軍僉節制使, 1672년에 어모장군 무신겸선전관禦侮將軍 武臣兼宣傳官, 어모장군 행 용양위부사 용禦侮將軍 行 龍驤 衛副司勇, 어모장군 행 훈련원첨정禦侮將軍 行 訓練院僉正, 황주진관병마사 첨절제사黃州鎭管兵馬司僉節制使, 통훈대부 행 수안군수通訓大夫 行 遂安郡守 를 역임했다. 묘 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승정원일기』, 『진위읍지』
최충국崔忠國(생몰미상)
본관은 수성, 호는 낙산樂山, 최희효崔希孝의 장남이다. 벼슬은 정략장군 행 충좌위부사용政略將軍 行 忠佐衛副司勇이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최형운崔亨運(1628∼1682)
본관은 수성, 자는 응회應會이며 1628년 독곡동 오좌마을에서 최전발崔雋發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649년(인종 27)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65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도총경력都摠經歷, 경상우병우후慶尙右兵虞侯, 파총把摠, 통훈대부 행 보성군수通訓大夫 行 寶城郡守, 경흥부사慶興府使, 갑산부사甲山府使,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청주영장淸州營將 등을 역임歷任 했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 으로 증직됐다. 묘는 안성시 원곡면 산대리 산150-1에 있다.
참고문헌 : <교지>, 『수성최씨대동보』
최희효崔希孝(1509∼1589) 무신
본관은 수성, 자는 언순彦順, 최자반崔子伴의 아들이다. 재덕을 겸비하고 문학에 탁월하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1531년(중종 26) 무과에 급제 정주판관이 됐다. 1540년 광주판관光州判官, 1543년 선천판관宣川判官, 1545년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을 지내고 1546년 창성부사昌城府使, 1549년 부령부사富寧府使 등을 역임했다. 1553년 이후 수군으로 나가 만포진첨사滿浦津僉使,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1565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부임하고 재임시 왜선 3척, 왜인 200명을 생포한 공으로 치하를 받았고 1559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 兵馬節度使가 됐다. 1565년 동지사 김억령金億齡을 따라 명나라에 갔을 때 무관이라고 업신여기던 명의 대신들을 탁월한 문장과 덕행으로 누르고 돌아왔다고 해 명종이 기뻐하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 兵馬節度使를 제수했다. 1566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됐고, 1573년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역임했다. 그 후 낙향해 진위면 탄현면 오좌동(현재 독곡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별세하니 선조 왕이 크게 슬퍼하고 권율 장군權慄 將軍을 예관으로 보내어 장례를 극진히 치르게 했다. 왕명王命으로 묘후산봉墓後山峰을 왕재라고 전해오고 있다. 묘는 독곡동(오좌마을) 산44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진위읍지』
한상학韓相學(1877∼1927) 문신
본관은 청주. 조선 고종조 말기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으며, 평택 출신의 친일기업인 한상룡의 맏형이다. 세조 때 영상인 한확韓確의 후손으로 한희교韓喜敎의 3자 중 장자로 태어나 일찍이 한학과 서도에 능통해 가히 명필이라 칭했다. 그는 외숙인 이완용(당시 내각총 리대신)의 도움으로 내직에 등용됐고 벼슬이 승정원 도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말의 풍 운과 격변기를 당하고 1910년 한일합방의 경술국치와 더불어 관직을 떠났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한익교 정리 『한상룡을 말하다』, 혜안, 2007.
한온韓薀(?∼1555) 무신
본관은 청주. 서탄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해 38세에 장흥부사에 부임해 진휼賑恤에 힘써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때 달량포에 왜선 70여척이 쳐들어오자 장흥 부사로 절도사 원적元績, 영암 군수 이덕견과 더 불어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1683년(숙종 9) 장흥읍인이 건립한 충렬사에 봉사됐으 며 병조판서에 증직됐다. 그 뒤 1696년(숙종 22)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서탄면 금 암리에 충신정문이 세워졌고 평택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 있다
참고문헌 : 『경기인물지』
홍윤성洪允成(1425~ 1475) 문신
본관은 회인, 자는 수옹守翁, 호는 영해領海, 초명은 우성禹成이다. 제년齊年의 아들로 팽 성현 서촌 임정리에 거주했다. 1450년(문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고, 무재武才가 있어 특별히 사복시 주부를 겸임했다. 1451년 한성부 참군·통례문 봉례랑에 임명됐다. 수양대군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 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인·김종서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적극 가담, 협력해 정난공신 2등에 책록 됐다. 이어 사복 시 판관에 승진되고 장랑을 거쳐 1455년 판사복시사가 됐다.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 참의 에 임명되고, 세조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익공신 3 등에 책록됐으며, 참판에 승진, 인 산군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예조 판서·경상우도도 절제사, 1459년 예조 판서에 임 명됐다.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됐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홍익한洪翼漢(1586∼1637) 문신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초명은 습霫, 팽성읍 함정리 출생이다. 진사 이성以成의 자. 이정귀李廷龜의 문인으로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 사서司書를 거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해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했으며,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적극 반대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화를 피하고자 평양 부서윤으로 나갔으나 끝내 오달제·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 뜻을 굽히지 않다가 그 곳에서 처형당했다. 평택의 포의사·광주의 현절사·강화의 충렬사· 홍산의 창렬사원·부안의 도동서원·영천의 장암서원·고령의 운천서원·평양의 서산서원 등에 제향 됐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 『화포집花浦集』, 『북행록北行錄』, 『서정록西征錄』등이 있다. 팽성읍 본정리에 ‘홍학사 비각’ 이 있다.
참고문헌 : 정옥자, 『병자호란기 언관의 위상과 활동-삼학사에 대한 재평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박광운, 『현절사와 삼학사』, 경기향토사학, 2007.
성남문화원, 『남한산성과 삼학사』, 성남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1997.
황전黃㙉(1597∼1668)
본관은 상주, 자는 극후克厚이다. 부는 증통훈대부 사복시정 정호이다. 관직에 나아가 1625년 영동현감, 1637년 영평현령, 1641년 금부도사, 1653년 문의현령, 1655년 평시령을 거쳐 1656년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묘는 포승면 만호리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해 아산 인주에 있는 종산으로 2009년 이장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황정호黃珽豪(1573∼1638)
본관은 상주, 자는 수언秀彦이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우한佑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택에 처음 정착한 상주황씨의 입향조이다. 관직은 행 선교장으로 사후 정3품인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 司僕寺正을 증직 받았다. 묘는 포승읍 만호리 원기에 있다.
참고문헌 : 『상주황씨대동보』
황효원黃孝源(1414∼1481) 문인
본관은 상주, 자는 사행士行, 호는 소원少原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장원해 예빈시 주부가 되고 예조좌랑·좌헌납·이조정랑을 역임했다. 1453년(단종 1) 검상을 거쳐 사인에 승진되고, 1454년 사복 시윤에 승진됐다. 1455년 수양대군(세조) 즉위에 협력한 공으로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동년 이조참의에 승진되고 1454년 호조참판에 승진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1458년 대사헌이 되고 형조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됐다가 경기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1460년 경기 감사로 재임 시 진위현을 순시할 때 현이 쇠약해 관노비와 지대支待가 없어 모든 일을 촌민 들이 하는 것을 보고 해남에 있는 노비 26명을 배에 싣고 와 진위현에 주어 영구 관노비로 삼게 했다. 대신이 이를 임금에게 아뢰어 특별히 복호復戶와 60결의 땅을 포상으로 받았 다. 1470년 우참찬이 되고 1471년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4등이 됐다. 익 호는 양평襄平이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위읍지』, 『조선왕조실록』
(황우갑_평택시민아카데미 회장)
(이재명_평택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