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 문화재

본문 바로가기
문화재>평택의 문화재>지정문화재指定文化財>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본문

도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문화재자료·기념물이 있다. 도지정유형문화재는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문화재인 점이 특징이다.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는 1659년에 세워졌다. 이 비는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육金堉(1580∼1658)이 죽은 뒤 호서지방에 실시한 대동법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김육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유형문화재 제132호 삼봉집 목판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것이다. 초기 판본은 생전인 1397년에 간행됐으나 1791년(정조 15) 왕명에 의해 재 판각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유형문화재 제137호인 팽성읍객사客舍는 동헌東軒과 부속 관아官衙건물이 유실돼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향교와 함께 팽성읍 객사리 지역이 옛 평택현의 읍치邑治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2)


번호 명칭 위치 지정번호 지정고시 시대
1
대동법시행기념비
소사동 140-1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0호 1973. 7. 10 조선시대
2
삼봉집목판
진위면 은산길 80-5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2호 1986. 5. 7 조선시대
3
팽성읍객사
팽성읍 동서촌로 101-3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7호 1989. 6. 1 조선시대


| 대동법시행기념비 |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紀念碑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지정일 : 1973. 7. 10)

소 재 지 : 소사동 140-1



대동법은 조선 중기 이후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하던 납세제도로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실시해 1894년(고종31)까지 계속됐다.
이 기념비는 1659년(효종 10) 영의정 김육이 충청감사로 있을 당시 삼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 할 때 삼남지방을 통하는 평택 소사벌 길목에 설치한 것이다. 현 위치에서 남동쪽 약 50m지점에 세웠던 것을 1970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기념비는 구질龜跌 위에 높이 약 2.1m, 폭 75cm, 두께 25cm의 대리석 비신碑身이 있고 비신 위에 좌우左右 용이 여의주를 보고 있는 섬세한 운룡문雲龍文이 조각된 융수가 있다.



| 대동법시행기념비 |



삼봉집 목판三峰集 木版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지정일 : 1986. 5. 7)

소 재 지 : 진위면 은산길 80-5



고려말 조선초 정치가이자 유학자인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문집 『삼봉집』 목판이다. 사당은 1912년 봉화 정씨 문중에서 양성현 성은면 산하리 287번지(현 진위면 은산리 287번지)에 5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해 사우를 건립했다. 1930년 당초의 종가터(진위면 은산리 202번지)에 이축移築했고 1970년 증·개축했다. 사당 5칸, 외삼문 3칸, 홍살문紅箭門 3칸으로 맞배지붕의 한식 골기와로 되어 있다.
사우 명칭은 시호를 따라 ‘문헌사文憲祠’라 했고 ‘유종공종儒宗功宗’이란 현판이 달린 사당 내에 위패와 영정이 있다.



| 삼봉집 목판 |



1988년 ‘삼봉집목판고三峰集木板庫’를 건립했다. 『삼봉집』 목판본은 1791년(정조 15) 왕명으로 대구에서 간행돼 오대산·정족산·태백산 사고 및 홍문관에 소장됐고 그중 태백산 사고 소장본 원판을 1912년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 14권 7책 목판 258매 중 236매를 보관 중이었으며 낙절본은 최근 복원했다.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정운경, 어머니 영주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학에 정진해 예악禮樂제도·음양·병력·의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건국에 기여했으며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집필·편찬해 조선 법제의 근본을 확립했다. 성리학적 이념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의 분야에서 폭넓게 활약했다. 왕권투쟁으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조선 태종)에 의해 1398년 8월 26일 죽임을 당했으며 이후 대원군 대에 복권됐다.



| 팽성읍 객사 |



팽성읍 객사彭城邑 客舍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지정일 : 1989. 6. 1)

소 재 지 : 팽성읍 동서촌로 101-3



조선시대 평택현 객사인 이 건물은 현종(1659∼1674) 때 크게 중창됐다. 1760년(영조 36)과 1801년(순조 1)에 중수했으며 현재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 가운데 3칸은 중대청中大廳이고 좌·우에 동·서헌東·西軒이 각각 3칸씩이다. 중대청은 내부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 달에 두 번 배례拜禮를 올리던 곳으로 멀리 있는 지방에서도 국가 시책을 충실히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원형 기둥에 초익공初翼工을 결구하고 지붕도 동·서헌보다 한단 높은 맞배지붕으로 구성해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동·서헌은 중앙 관리들을 접대·수행하는 기능과 이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대문간채 중앙 1칸의 지붕에는 용마루 양끝에 용두龍頭를 새겨 관청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했다.



주석

2) 평택시·경기도박물관,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경기도, 『경기문화예술총람』, 1990. / 평택시, 『평택군지』,          1984. / 평택시, 『송탄시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