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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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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수리100)


조선시대 양성군 승량동면, 갑오개혁 뒤에는 수원군 가사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메 단일마을로 두메리라고 해서 진위군 현덕면에 포함시켰다. 두메리는 1938년(주민들은 1958년이라고 주장) 주민들의 요구로 장수리로 바뀌었다. 마을규모는 120호이며 경주김씨, 해주오씨가 대성大姓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반농반어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이른 봄부터 석화진을 중심으로 어로활동을 하다가 농번기가 시작되면 농사를 지었다. 근대 이후 간척사업으로 경작지가 확대되면서 농업 중심이 됐다. 간척사업은 일제 말과 3공화국 시절 대규모로 이뤄졌다. 1939년(소화 14) 대가뭄 때에는 이범태 씨가 빈민구제를 빌미로 시작했고, 제3공화국 시기에는 정부가 새마을사업으로 현포수리계를 조직하여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간척사업은 1970년대 초 성공했고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고 경지정리 사업이 진행되면서 옥토로 변했다.


장수리는 후미진 마을이어서 근대교육의 혜택이 늦었다. 그러자 일제강점기부터 마을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을 추진했다. 1930년대 설립한 동광학원이 대표적이다. 동광학원은 현재의 마을회관 터에 15칸 규모의 건물에 교실 2개, 교무실 1개로 운영됐다. 이춘희, 우상호, 오재천 등 마을 출신의 지식인들이 교사로 봉사했다. 장수리 입구에는 김정한 효자비가 있다. 효자비는 인근 마을에 장수리를 효자마을로 인식하게 했다. 당제와 두레와 같은 공동제의와 조직들도 마을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지금도 장수리는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한다. 하지만 마을 남쪽 바닷가로 평택항이 건설되고 주변지역에 대한 개발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언제 경관과 생활환경이 변할지 모른다.



본래는 두매라고 불렀던 장수리(2012)

| 본래는 두매라고 불렀던 장수리(2012) |



주석

100) 홍병욱(87세), 공창근(79세), 오영환(72세), 김흥봉(69세), 2007년 8월 장수리 경로당 앞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