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정리 > 마을

본문 바로가기
마을>평택의 마을>현덕면>현덕면의 자연마을>운정리
■ 운정리

본문

(10) 운정리103)


갑오개혁 뒤 수원군 포내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리閑里, 벽우리, 구억촌, 운정리를 통합하여 운정리라고 했다. ‘운정’이라는 지명은 ‘구루물’에서 왔다.


운정리의 자연지명은 피우치(1리), 구루물·검덩굴(2리), 구억말·한말(3리)로 형성되었다. 운정1리 ‘피우치’는 현재 20여 호가 모여 산다. 주민들에 따르면 피우치는 해방 전후 3, 40호가 넘었는데 이농하는 사람이 많아 인구가 줄었다고 한다. 피우치라는 지명은 ‘근심을 피해가는 곳’에서 유래됐다. 이 마을은 함평이씨가 대성大姓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함평 이씨는 9대 300년을 살았다고 한다.


운정2리 ‘구루물’은 ‘운정’이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구루물이라는 지명에는 ‘지세地勢가 높아 우물에서 나온 푸른 구름이 마을에 어렸기 때문’이라는 설과, ‘일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팔정지八井地 가운데 하나’였다는 설이 전한다. 이 마을도 함평이씨의 동족마을이다. 지금도 30호 가운데 한두 집을 빼고는 모두 함평이씨다. 구루물과 인접한 검덩굴은 행정 구역 개편 때 한 마을로 묶였다.


운정3리 구억말과 한말은 1914년 당시만 해도 두 마을이었던 것이 같은 마을로 묶였다. 구억말은 30여 호가 모여 산다. 구억이라는 지명은 ‘구석말’에서 유래됐다. 이 마을도 함평이씨가 대세를 이루지만 근래에는 포승지역이 개발되면서 타성들도 많이 들어왔다. 한말은 160여 년 전 경주김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하지만 김씨들은 가문이 번창하지 못했고 나중에 들어온 함평이씨가 대성大姓을 이루었다.


운정리는 지리적으로 포승지역에 가깝다. 인광리 현덕면사무소에 가려면 안중으로 나갔다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되지만 포승읍은 걸어서 15분 거리다. 학교도 포승으로 다니고 경제적으로도 포승과 가깝다. 그래서 주민들은 포승읍으로 합쳐지기를 바란다.


운정리 일대는 예로부터 논농사 지대였다. 고라실논이 많았고 땅은 기름졌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자작농은 얼마 안 됐고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운정리도 소작농들이 자영농으로 성장한 것은 농지개혁이고, 척박한 농지에 풍부한 농업 용수를 공급받기 시작한 것은 아산만방조제의 영향이다. 운정리는 일제강점기(1927년) 진위구락부가 탄생한 마을이다. 진위구락부는 지주였던 이장헌이 지원하고 이대헌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조헌·이민복·이민행·이국헌이 임원이 되어 운영되었던 사회운동 조직이었다. 이들이 설립한 운정리강습소는 근대교육시설이 없던 현덕면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주석

103) 이계은(73세), 최숙화(77세), 최병례(80세), 2006년 2월 운정2리 경로당 및 이계은씨 자택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