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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백동竹栢洞139)
죽백동은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盤谷面지역이었다. 1899년 편찬된 양성 군지에 따르면 반곡면에는 침교리砧橋里(방아다리)·청룡리靑龍里·진촌리· 관동리와 같은 자연마을이 보인다. 침 교리·청룡리·관동리는 현재의 죽백1 동·월곡동·청룡동 등이다. 진촌리는 현재 어떤 마을인지 알 수 없다. 월구 리·내촌·재빼기·가내와 같은 자연 마을은 기록에 없어 당시에는 독립된 행정구역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죽백동이라는 지명은 죽백3동 ‘재빼기(또는 댓빼기)’에서 왔다. 재빼기는 ‘원죽백’으로 도 불린다. ‘재빼기’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죽백3동의 긴 능선을 넘어갔기 때문 에 유래됐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춘향이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재빼기 고갯마루에서 담뱃대를 빼물었다고 해서 ‘댓빼기’라고도 부른다. 해방 전 죽백3동은 20∼30호쯤 됐다. 죽백3동의 자연마을은 재빼기·성안·가내다. 또 재빼기는 마을의 위치에 따라 깊은다리(심교)·진등(긴 산등성이)으로 구분된다. 성안은 교회 서남쪽에 형성된 6호 내외의 작은 마을이지만 소사벌택지지구 개발로 대부분 이주했다. 가내는 평택-원곡 간 도로 건너편의 통복천 변에 형성된 주막거리다. 대문재는 재빼기 입구다. 근대 이전 대문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 말을 타고 넘어가던 사람도 이곳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다. 죽백3동은 구릉지대에 마을이 있는데다 토질이 척박하고 메말라서 무척 가난했다. 1950∼60년대만 해도 안성군의 13대 한해旱害지역에 선정될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배다리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일본인 미야사꼬가 ‘미야사꼬 과수원(3만 평)’을 만들었다. 그 옆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영풍농원(옛 영풍원)’ 이 있었다.
해방 후 일본인 과수원에서 일하며 재배기술을 익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과수재배를 시작했고, 지금은 주민들 대부분이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죽백1동은 방아다리다. 방아다리는 죽백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 규모는 한국전쟁 직후 100여 호였고 지금은 전원주택을 제외하고도 120호가 넘는다. 본래 이 마을은 양성군 반곡면 침교리였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미수 허목의 후손들인 양천허씨와 양성이씨 상서공파가 많이 산다. 방아다리 마을은 산장너머(서쪽, 산장모퉁이, 1반)·속뜸(가운데, 속두모퉁이, 2반)·죽백초등학교 주변의 강당말(3반)로 나뉜다. 세 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같은 마을이어서 마을회관이나 공공시설은 공유하지만 체육대회라든가 각종 행사에서는 서로 나뉜다. 강당말에 해방 직전(1944년) 죽백초등학교가 설립됐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은 청룡천이다. 청룡천은 개울물이 깊어 징검다리로 건너다녔다. 마을에서 사용하던 디딜방아를 가져다가 외나무다리를 놓고 나서 방아다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방아다리에는 100여 년 전 돌다리가 놓였다.
마을주민 김종학 씨 조부가 힘이 장사였는데, 혼자 3백 근이나 되는 바위를 져다가 개울가에 걸쳐 놓고 건너다니게 했다.
죽백2동은 내촌이다. 마을은 북동쪽만 살짝 열려 있을 뿐 마을 전체가 삼태기처럼 작은구릉으로 둘러싸여 포근한 느낌이다. 본래 약 30호쯤이었다가 근래에 이주민이 늘어 확대 됐다. 내촌은 구릉으로 둘러 싸였지만 예로부터 물이 귀하고 토질이 척박했다. 식수를 구 하는 일이 중요했기에 우물이 세 개나 있었다.
| 죽백1동 방아다리(2010) |
| 죽백1동 배과수원(2012) |
주석
139) 죽백1동 : 구자성(76세, 노인회장, 2012년), 이정종(75세, 2012년),
이종성(76세, 2012년), 이갑종, 이기종(82세, 2012년)
죽백2동 : 박장수(75세, 2002년), 죽백3동 : 이계환(70세, 2002년)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