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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1594년 임진왜란 당시 세스테데스 신부가 처음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로 개종했다. 이런 사실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동했던 프로에스 신부가 보낸 1595년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16)
그 후 학자들이 연경燕京 사신을 통해 서학사상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으로 접하다가 영조 말기부터 정약용·정약전·권철신·이벽 등 남인 유력한 인사들에 의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들은 1779년(정조 3) 경기도 광주 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천주학 소개와 교리를 논증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다져 이곳이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가 됐다.17)
이승훈은 1783년(정조 7) 부친 이동욱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 함께 따라가 1784년 북경교구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벽과 권일신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세 사람이 남인 실학자와 중인계급을 포교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자생적인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다.18) 진산珍山사건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면서 명도회明道會의 조직적인 포교에 힘입어 천주교가 크게 발전했다.
천주교는 정부와 유학자들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 또는 사교邪敎로 이단시했다. 무부무군無父無君 종교로 간주해 국법으로 엄금하는 한편 위반하는 교도들은 사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비롯한 황사영백서사건,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천주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전기를 맞았다.19)
1911년 처음으로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할·독립했고 그때까지 우리나라 유일한 교구였던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됐다. 새로운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하면서 교
구가 늘어나 1920년 원산교구, 1927년 평양교구, 1928년 연길교구, 1937년 전주교구·광주교구, 1939년 춘천교구 등이 잇달아 신설됐다.20)
주석
16) 『한국기독교의 역사』, 한국기독교연구회, 1991, pp.58~59.
17) 『평택군지』, pp.748~749.
18) 『한국기독교의 역사』, p.74.
19) 최석우, 『한국의 종교』, 문화공보부, 1989, p.62.
20) 위의 책,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