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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鄕校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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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5)



향교는 공자와 유교 성현들을 모시고 제사지내며 교육하던 지방 관학이다. 조선이 건국 되면서 인재양성과 성리학 이념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각 고을마다 향교를 세웠 다. 1127년(고려 인종 6) 왕의 조서詔書에 여러 주와 군현郡縣에 향교 등 학교를 세우도록 명했다.
향교 교육과정은 소학·사서·오경·성리대전·삼강행실·이륜행실·효경·심경·근사록 등의 경서와 통감을 가르쳤다. 교관은 교수·훈도·교도·학장이라 했다. 정원은 고을 과 지방의 크기에 따라 30명, 50명, 70명, 90명으로 규정하고 나이는 15∼20세로 다양했다. 조선시대에 평택지방에 향교가 시작됐다. 향교는 임진란과 병자호란 때에 대부분 소실 됐다.
조선시대 향교는 1현 1교가 원칙이었다. 고을 중심에 관아官衙·객사客舍와 함께 향교가 설치됐다. 평택지방은 진위현振威縣과 평택현平澤縣 그리고 몇 개의 고을에 속한 여러 지역이 있었다. 향교도 ‘평택향교’ 와 ‘진위향교’ 두 곳이 각각 설치됐다.



| 평택향교 |



현존하는 향교는 대부분 수리 보수를 해 팽성읍 ‘평택향교’와, 진위면 ‘진위향교’가 현재까지 유지관리 되고 있다.



● 평택향교6)


평택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1983년 9월 19일 지정됐다. 팽성읍 객사리에 건립 됐다.
평택향교는 조선 1413년(태종 13) 처음 지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불타 여러 차례 복구했다. 높은 언덕 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그 앞쪽에 교육공간으로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 배치를 따르고 있다.
건축은 익공翼工양식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조선후기 건축양식이다. 건물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강학講學공간이 앞에, 제향祭享공간이 뒤에 배치됐다.
1979년 4월 23일 당시 전교인 박세홍朴世洪이 유림의 협찬으로 복원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17세기 중엽에 중수된 대성전이다. 대성전에는 문성왕으로 불리는 공자를 비롯한 5성위,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명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명륜당은 19세기 말에 중수됐다. 19세기 말 관아 건물의 중수는 서원 철폐와 관련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팔자지붕)이다. 지붕 처마 밑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꾸민 익공 양식이다.
직제로는 주에는 종6품의 교두 1인을 두고, 군에는 종9품의 훈도 1명을 두어 교육을 담당했다. 교생은 부와 대도호부大都護府에는 각 90명, 도호부都護府 각 70명, 군 각 50명, 현 각 30명이 정원이었다. 평택은 현에 속해 30명 정원이었다.
교수관은 향시에 합격하거나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있는 사람으로 선발했다. 15∼16세가 돼야 입학하고 교생들은 사역使役이 면제됐다.
평택향교는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대성전만 복원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강학講學이 중단됐고, 주로 제향祭享기능과 의견을 모으는 일을 담당했다. 19세기 말 명륜당이 복 원됐지만,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향교에서 교육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 진위향교7)


진위향교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으며, 대성전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1983년 9월 19일 지정됐다. 진위향교는 조선 초기 현유의 위패를 봉안·배향하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1398년(태조 7)에 창건됐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으로 인해 완전 소실됐고 1597년(선조 30) 지금 위치에 다시 증수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해 다시 소실됐다. 향교 앞에 사는 하리下吏 최응수가 위패만 보존하다가 1644년(인조 22) 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중수하고 1660년(현종 1) 현령 송박이 대청을, 1839년(헌종 5)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했다. 1889년(고종 26) 전면적으로 개보수하고 1987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한 이후 정비했다.



| 진위향교 |



공간배치는 일반적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를 따른다. 제향祭享공간과 강학講學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대성전·명륜당·내삼문·외삼문·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과, 송조 4현과 우리나라 성현聖賢 18현의 위패 등 27위가 모셔져 있다. 명륜당은 교수관이 거처하면서 강학講學하는 공간이다.
정원은 평택향교와 같이 진위현 지역으로 교생은 30명이었다. 국가에서 토지·노비·전적을 지급받아 운영됐으며 교관校官도 평택향교처럼 향시에 합격하거나 명망 있는 학자 중에서 관찰사가 선발해 임명했다.
조선 후기에는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진위향교도 평택향교처럼 제향祭享기능과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모으는 역할만 했다.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후 향교교육은 본래의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上丁일에 석전의식이 거행된다.



주석

5) 피정만, 앞의 책, pp.77~87.

6) ① 김명자, 앞의 책, p.67.
    ② 「평택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발췌

7) ① 김명자, 앞의 책, p.68.
    ② 「평택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