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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8)
서원은 조선 중기 사림士林들이 선현제향과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다. 송나라의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조선시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됐다. 각 지역 유학자들이 곳곳에 서원을 건립했고 송시열의 경우 무려 44개의 서원에 배향配享 되기도 했다. 대원군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서원 철폐령을 강행해 전국에 47개만 남고 모두 철거됐다.
● 포의서원褒義書院
조선시대 평택지방에 서원書院이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나 삼학사 중 화포 홍익한을 배향하기 위해 1661년(현종 2)건립된 ‘포의사’가 대동여지도와 여러 문헌에 ‘포의서원’이라는 기록이 있어 사당과 서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홍익한(1586~1637)은 본관이 남양으로 팽성읍 함정리 서원말에서 태어났다. 30세(1615)에 사마시司馬試(鄕試)에 급제해 생원이 됐고 1621년 문과에 급제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1624년이(당시 39세) 돼서야 공주 행재시 문과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섭렵하고 1636년 정4품 사헌부 직책을 맡았다.
명明이 쇠퇴하고 청淸이 건국되자 친명배청親明背淸 입장에 섰다. 병자호란(1636년)때는 스승 이정구·김상헌·윤집·오달재 등과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주장했다. 청나라는 홍익한등 척화파를 청나라로 압송해 처형했다.
홍익한은 북벌정책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됐다. 팽성읍 함정리에 포의사와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도의 충렬사, 평양의 서산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등에 배향됐다.
| 포의동서원 |
| 광여도 평택현 지도에 표기 된 포의동서원 |
주석
8) 김명자, 앞의 책, pp.6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