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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유선방송’ 사업이 시작된 것은 라디오 방송만 있었던 1957년 7월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수신기도 변변치 않았고, 방송사업은 국영방송인 KBS가 중심이었다.29)
1957년 자유당 정부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방송시설을 복구해 대중오락과 정책홍보수단을 재건하고자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전국 약 4만 7천여 개의 마을에 배터리 전원 라디오는 구하기 힘들었다. 이장 집에 앰프를 설치하고 마을 집집마다 유선으로 스피커를 연결하게 됐다. 1961년까지 정부가 설치해준 앰프는 1만 개가 넘었고 민간업자 참여로 앰프촌 사업이 점차 민간 유선방송 사업으로 확대됐다.
1961년 8월 ‘유선방송 수신관리법’을 제정했다. 그 후 국산 라디오 수신기 보급, KBS라디오 방송망 확장, 추가로 문화방송이 등장해 정부의 라디오 보급정책은 성공하게 됐다.
스피커 방송망은 1967년 81만 5천대를 절정으로 역할을 끝냈다. 유선방송은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KBS텔레비전으로 시작된 ‘텔레비전 시대’로 역사적 사명을 인계했다.
평택지역에는 당시 작은 규모로 운영되던 유선방송을 공무원 출신 김장규30)가 인수해 1977년 5월 24일 ‘평택유선방송사’를 설립·운영하면서 유선방송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선방송은 난시청을 해소하기 위해 운영됐으나 낮 시간대에 지상파 방송에 방영됐던 프로그램을 녹화 재방송하는 수준이었다.
유선방송은 1990년대 평택지역에 ‘평택유선방송’, ‘송탄유선방송’, ‘안중유선방송’, ‘팽성유선방송’, ‘청북·고덕유선방송’ 등 5개의 유선방송이 영업 중이었다. 그중 평택유선방송은 평택시와 협력해 ‘평택시정소식’ 등 시민생활에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고 다른 유선방송들은 난시청 해소와 낮 시간대 재방송 중심이었다.
198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중계유선방송이 만연하게 되자 다 채널 다 매체 방송인 케이블TV를 육성해나가기 위해 ‘종합유선방송법’을 입안했다.
1990년 4월 30일 공보처에 ‘종합유선방송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케이블TV 도입이 본격화 됐으며 27차례에 걸친 공청회와 토론회를 통해 ‘종합유선방송법안’이 1991년 12월 31일
법률 제4494호로 제정·시행됐다.
공보처는 법 제정 후 2년 동안 케이블TV 구역 고시와 기술 규격마련·허가신청 접수·평가 결과 발표, 공개청문회를 통해 1997년 1월 14일 서울 등 6대 도시 전역 44개 구역과 각
도의 시범지역 1개 구역 등 모두 54개 지역의 케이블TV 방송국 사업자를 선정·발표했다.
종합유선방송국(SO·System Operator) 1차 사업자로 선정된 54개 방송국은 시험방송 기간을 거쳐 1995년 3월 1일 케이블TV 본방송을 시작했다. 시기가 늦춰졌던 2차 SO는
1997년 2월 15일 전국적으로 나머지 62개 구역을 20만 가구 내외 기준으로 광역화해 23개로 재조정·고시하고 그 해 5월 사업자가 선정돼 케이블TV의 전국화가 가능하게 됐다.
이때 3개 시·군이 통합된 평택시는 용인군·이천군·안성군을 포함해 1개 SO를 허가했다. 동아제약을 중심으로 한 ‘한국케이블TV 경기남부방송’과 서울이동통신과 태평양이 각
각 사업자로 허가를 신청했다. 평택·용인·이천·안성지역 사업자로 동아제약과 영풍제지·평택산업 등의 법인 주주와 김장규 등 개인주주가 참여한 ‘한국케이블TV 경기남부방
송’이 선정됐다. 회사 이름은 ‘한국케이블TV 기남방송’(약칭 GBC기남방송)으로 변경됐다.
| 평택유선방송 주조정실 |
주석
29)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한국케이블TV 5년사』, 2000.
30) 김장규는 ‘평택유선방송’ 대표이사, 한국유선방송진흥회장, ‘기남방송’ 대표이사와 ‘수원방송’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케이블TV방송 발전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