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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민주화시대의 변화

본문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 군부세력에 의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5·16 군사정변은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대두시켰고 군부독재체제의 성립에 따른 시 민사회의 저항으로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도 됐다. 따라서 5·16 군사정변을 계기 로 한국사회는 산업화의 길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길을 가게 됐다.
1956∼57년 무렵 우리나라는 6·25 한국전쟁 이후 경제운영의 목표를 단순 복구와 재 건에서 성장과 발전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구조적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이 연구는 이런 구조적 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를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한국전쟁 이 국민들 사이에서 반공이념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냈고 좌익세력 제거를 위한 결정적 계 기가 됐다. 둘째, 한국전쟁을 전후로 마무리된 토지개혁은 지주계급의 몰락과 함께 그들 중 일부를 산업자본가로 변신시킴으로써 근대적 산업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 는 사업가 계층을 만들어냈다. 셋째, 1950년대 중반 이후 원조당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미 국 유학 혹은 국제경제기구 등 파견근무 훈련을 통해 선진적 경제기법과 발전 지향적 가 치를 습득한 소수의 인물들이 관료집단, 특히 한국은행 조사부·재무부·예산국·1956년 창설된 부흥부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넷째,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미국 원조에 대해 생산 재 시설의 원조를 요구했던 한국 정부와의 원조를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한국정부는 1954 년 산업은행을 설립하고 ‘경제부흥특별회계’ 등 특별회계를 설치하는 한편 상공부 주관으 로 각 산업별·제품별로 생산계획을 수립해 적극적으로 부흥계획을 수립했다.130) 그리하여 “1953년 중엽에서 1956년 중엽에 이르는 부흥재건기…이 기간 중 한국경제는 인플레를 수 습하고 생산을 1949∼50년 수준을 상회하는데 성공했고, 이후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터 전을 마련한 성공한 기간”131)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조건이 성립한 것은 이미 자유당 집권기였다. 따라서 자유당은 집권기 간 동안 경제적 재건과 부흥을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다만 이러한 자유당의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이 이승만 독재체제의 유지, 강화에 어떠한 형태로 든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유당 집권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긍정적인 흐름은 1960년 4·19혁명에 의해 집권한 민 주당 정권에 의해 확대·재생산돼야 했다. 특히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에 따라 이승만 정권이 내걸었던 북진통일론이 부정되면서 남북한 간의 체제경쟁은 경제적인 측면이 보다 강화될 것이라 생각해 경제발전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리고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 부흥부의 개편, 국토건설사업 추진, 한·일회담의 적극적 추진 등을 포함한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했다.132)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에 의해 밀려났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북한과의 통일을 통한 민족국가 형성보다 산업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상정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군사정변의 성공 이후 ‘좌파적’ 질서 모색과 급진적 통일운동을 일시에 중단시켰고, 국가 관료제의 재정비와 장기경제개발계획을 본격 추진했으며, 그 방법으로 대외 지향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수출지향적인 정책과 외자도입정책을 채택했으며 미국·일본과의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기본으로 설정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

|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 |



이와 같이 해방 이후 한국사회를 규정하던 질서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해 완전히 변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따라서 평택지역도 이러한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평택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상을 나타내주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의 김영미 교수의 연구가 있을 뿐이다.133) 이외에 김영미 교수는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2009)에서 평택 관련 내용을 서술했다. 1960년대 이후 평택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이들 연구와 함께 이 시기 신문자료나 평택지역 출신 인물들이 남긴 일기 등의 자료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평택군 시기의 통계 자료를 통해 평택지역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권식의 일기는 경기문화재단에서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Ⅰ-평택 대곡일기(1959∼1973)』,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Ⅱ-평택 대곡일기(1974∼1990)』, 『평택일기로 본 농촌생활사Ⅲ-평택 대곡일기(1991∼2005)』의 세 권으로 정리돼 평택지역 농촌사회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곡일기

| 대곡일기 |



1962년 발행된 제2회 『통계연보』에 따르면 평택군은 1961년 12월 31일 현 재 평택읍(10리)·송탄면(12리)·진 위면(12리)·서탄면(10리)·고덕면(11 리)·오성면(14리)·청북면(13리)·포 승면(9리)·현덕면(12리)·팽성면(25 리) 등 1읍 9면 128리로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1962년 6월 15일 공포된 ‘평 택군 조례 제25호’로 송탄면 신장출장 소가 설치됐고, 1962년 11월 21일 공 포된 ‘법률 제1177호’로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돼 1읍 9읍이 2읍 8면으로 바뀌었다. 1972년 9월 1일 공포된 ‘평택군 조례 제330’호에 따라 평택군 안정출장소가 설치됐으며, 1979년 4월 7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9409호’에 따라 팽성면이 팽성읍으로 승격돼 평택군 은 3읍 7면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변경은 인구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택군의 인구 변화] 134)

(단위 : 가구, 명)

연도 가구수 인구(명) 1가구당 평균
가족 수(명)
남자 여자
1961 26,795 76,810 79,019 155,829 5.8
1966 32,585 95,103 94,092 189,195 5.8
1971 37,798 100,742 101,681 202,423 5.3
1976 44,712 113,198 114,636 227,834 5.1


안정리 K-6 미군기지(1952)

| 안정리 K-6 미군기지(1952) |



K-55 미공군기지 정문을 중심으로 기지촌이 형성되었다.(1960년대)

| K-55 미공군기지 정문을 중심으로 기지촌이 형성되었다.(1960년대) |



1962년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했다. 일본 해군기지였던 안정리 302부대를 해방과 동 시에 미군이 사용하게 되면서 K-6 기지라 명명했으며, 1952년 서탄면·송탄면 구장터 일 대에 미군이 K-55 공군기지를 창설하면서 한국전쟁 피난민 약 2만여 명이 직업을 찾아 기지 확장건설에 참여135)하면서 변화가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지는 미 공군 전략기지로 개편됐으며 사령부가 들어서고 종합비행장으로 건설됐다. 이에 따라 미군기지 주변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캬바레·술집·여관 등이 나타났고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업도 많았다. 송탄과 안정리 일대에는 미군부대 정문과 후문을 중심으로 평택지역은 1962년 283개소였던 캬바레가 1965년에는 588개소로 급증136)했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송탄에 성매매로 등록된 여성은 2,500명이었다 한다.137) 이들은 자치조직인 이른바 ‘자매회’라는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했다. 우리나라에서 기지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일본 군대 위안부 성격의 기지촌이 형성됐고 이것이 해방 이후부터 1950년 사이에 미군 기지촌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이후 미군기지촌은 1960년대 말까지 전국으로 확산돼 사회문제가 됐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기지촌에 대한 통제를 가했다.138) 이와 같이 평택지역의 도시화 과정에서 기지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택지역이 기지촌이라는 이미지로만 각인된 것은 아니었다.
평택지역은 일제시기부터 간척사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평택지역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평택시의 경우 도 청북면 삼계리에서 신포장터에 이르는 갯벌을 간척한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139)
구한말 일본헌병사령관이 ‘평택군 석교리에 거주하는 유인원柳寅阮에게 평택군의 원야 800정보에 대한 개간권을 허가했는가’를 조회140)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팽성지역 에 대한 개간이 민간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강점 직후부터 평택지역에 대한 개간은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준비·행해지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에서는 미개간지 조사에 착수해 금년 중 에는 경기도의 남양·수원·평택과 황해도의 안악·재령·봉산의 6군에 시행 완료키로 하고 기타 지역은 금후 5개년간에 전부 조사완료하기로”141)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 에 따라 팽성읍의 개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 결과를 확인 할 수 없다.
일제시기 평택지역에 대한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앞에서 본 동양척식주 식회사의 간척에 관한 증언이나 진위흥농주식회사와 임전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라는 회 사, 그리고 노사카 칸지野坂寬治라는 토지개량업자 등 일본인회사나 일본인 토지개량업자 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사카 칸지野坂寬治는 진위군 청북면에 1914년 2월 9일 허가를 받아 763.1정보를 개간했고142) 1921년에는 진위군 청북면과 수원군의 6개면에 걸 쳐 간사지를 개간해 968.5정보를 개간했다.143) 또, 나까네 로우노신中本惣之進이 1921년 5 월 3일 허가 받아 1923년 8월 17일 준공된 포승면에서 지구면적 14.1정보, 개답면적 13.5 정보를 개간했다.144) 나까네는 일본 동경시 麴町區 內幸町 1정목 1번지에 소재했던 회사로서 경성부 황금정 3정목 260번지에 조선지점이 설치돼 있었던 삿코우주식회사蕯興柱式會社의 부사장이었다. 이 회사는 이 토지 개간 및 간척·경지정리 및 수리사업의 설비 경영과 이 에 관한 공사의 청부, 그리고 부동산의 매매 및 임대차 등을 목적으로 했다.145) 1913년 5 월 서탄면에 설립된 진위흥농(주)146)는 토지의 개간·경작·식수 및 부대사업·경작상 필 요한 자금의 공급·농작상 필요한 역축役畜의 사양飼養 및 매매·대차·농산물의 매매 등을 목적으로 했다. 진위흥농은 1935년 7월 3일 회사를 해산했는데 이 회사 소유의 전답 448,000평을 200여 명의 소작인에게 매매했다.147) 이에 대해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朝鮮新聞』은 이를 ‘자작농창정自作農創定을 위한 영단英斷’이라 보도함으로써 당시 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던 농촌진흥운동과 연결시키고 있다.148)
모리타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林田朝鮮農事改良柱式會社는 1925년 3월 13일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185에서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됐다. 회사 설립 목적은 조선에서의 토지 매수 및 농사개량에 있었다.149) 이 회사의 사장인 하야시다 하루지로우林田春次郞는 1909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망호리에 설립된 조선전천농사주식회사朝鮮田川農事柱式會社의 이사로서 이 회사 전체 주식 1480주 중 376주를 소유한 대주주였다.150) 하야시다는 1928년 10월 29일 경성에 거주하는 니시야마 키치베에西山吉兵衛에게서 진위군 오성면 창내리의 공유수면(바다) 72,251평을 매수해 답으로 간사하는 허가를 받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야시다 개인이 매립허가를 받았으나 1925년 8월 6일 제311호로 면허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 면허는 모리타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林田朝鮮農事改良柱式會社설립허가로 보인다.151) 그리고 매립공사 준공기간을 1929년 12월 31일까지로 연장허가152)를 받았다가 다시 1932년 12월 31일까지로 다시 연장했다.153) 그러나 하야시다가 준공기간 내에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해 매립면허를 취소154)당해 공사의 완공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해방 이후의 간척사업에 대해서는 팽성읍의 사례를 들 수 있다. 1954년 5월 13일 경기도 승인에 따라 복귀불능 난민정착사업 일환으로 안성천 하류의 아산만 간척사업이 전개돼 150여 정보를 간척했다.155) 이 도두리 간척사업은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피난민들의 정착지를 확보하고 식량증산을 꾀하기 위해 간석지가 넓은 바닷가에 집단정착촌을 건설하려 했던 난민정착사업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이 결과 평택지역에는 팽성읍에 장단사업소, 포승읍에 연백사업소가 설치됐다.
팽성읍의 도두리 간척사업은 장단사업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156) 도두리 간척사업이 종료된 이후인 1964년 주영하·최옥자가 지주라 칭하면서 간척민과의 분쟁이 시작됐다.
1965년과 1981년 법정투쟁에서는 지주 측이 승리157)해 토지소유권분쟁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으나 1999년 12월 경기도가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건의한 ‘경기도세감면조례중 개 정조례’가 개정되면서 지주 측인 대양학원이 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대체 토지로 가평군 상면 상동리의 1,119만 5천여㎡의 토지를 분할 받았다. 또 이 과정에서 정 착민과 대양학원 측은 지방세를 전액 감면받았다.158) 난민정착촌사업은 평택지역에서는 일 반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평택 대곡일기』를 분석한 김영미의 연구에 따르면 5·16 군사정변 이후 평택 지역에서는 정부 권력에 따른 농민 동원 방식의 변화가 발생했다. 즉 5·16군사정변 이전 에는 마을회인 ‘동회’는 ‘회’라고만 불렸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에 ‘동회’로 불렸다 한다.
동회는 이장이 종을 치면 소집됐는데 논의 사항은 5·16 군사정변 이전과 이후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 논의된 사항은 크게 도로 작업·비료 배급·기타로 나눌 수 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농정 관련 사항(퇴비 증산·대두 및 정도 매상· 가마니 치기), 마을 환경 개선 사항(표지판과 게시판 설치·구호미 확보·마을회관 신축· 우물 수리), 생활 개선(조기청소·관혼상제 간소화·화장·녹화·아궁이 개량) 등의 지시 사항이 하달되고 있다는 것이다.159) 이 는 마을 자치적인 ‘회’를 ‘동회’로 재편 해 면 행정에 수직적으로 편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또한 논의사항을 통 해 볼 때 정부의 각종 정책을 각 마을 에 강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 로 5·16 군사정변 이후 지역주민에 대한 통제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강해 졌다고 할 수 있다.



팽성읍 신대리·도두리 간척사업(1954)

| 팽성읍 신대리·도두리 간척사업(1954) |



주석

130) 김세중, 「5·16과 산업화 체제의 대두-그 역사적 의미와 권위주의적 정치동학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101, 2005, p.72.
131) 송인상, 『부흥과 성장』, 21세기북스, 1994, p.205.
132) 김영선, 「민주당 복안의 골자」, 『사상계』 1960년 6월과 「국토건설계획과 실업과 대책」, 『사상계』 1961년 1월.
133) 김영미, 「평택 칠원마을이 최우수 새마을이 된 사연」, 『역사와 현실』74, 한국역사연구회, 2009.
김영미, 「어느 농민의 생활세계와 유신체제」, 『한국근현대사연구』74, 한국근현대사학회, 2012.
김영미, 「『평택 대곡일기』를 통해서 본1960~70년대 초 농촌마을의 공론장, 동회와 마실방」, 『한국사연구』161, 2013.
134) 『제2회 통계연보』, 평택군, 1962, 7쪽 ; 『제17회 통계연보』, 평택군, 1977, p.19.
135) 조명숙,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여성신학적 접근 : K-55 미 공군 오산기지를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신학 전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p.8.
136) 조명숙, 앞의 논문, p.11.
137) 조명숙, 앞의 논문, p.10.
138) 홍성철, 『유곽의 역사』, 페이퍼로드, 1972, p.172.
139) 『평택시민신문』 2005년 11월 9일.
140) 『황성신문』, 1905년 1월 7일.
141) 『매일신보』, 1911년 9월 14일.
142) 朝鮮總督府土地改良部,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 1928, p.105.
143) 朝鮮總督府土地改良部, 『朝鮮の土地改良事業』, 朝鮮印刷株式會社, 1927, p.72.
144) 朝鮮總督府土地改良部,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 1928, p.105.
145) 『朝鮮銀行會社要錄』, 1923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46) 「會社設立許可」, 『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7월 4일.
147) 『동아일보』, 1935년 7월 3일.
148) 『朝鮮新聞』 1935년 7월 3일, 「会社を解散して自作農の創定へ 振威興農会社の大英断」.
149) 『朝鮮銀行會社要錄』, 1927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50) 『朝鮮銀行會社要錄』, 1923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51) 「朝鮮公有水面埋立令二依ル處分事項」, 『朝鮮總督府官報』 1928년 11월 6일.
152) 「朝鮮公有水面埋立令二依ル處分事項」, 『朝鮮總督府官報』 1928년 11월 15일.
153) 「朝鮮公有水面埋立令二依ル處分事項」, 『朝鮮總督府官報』 1929년 12월 28일.
154) 「朝鮮公有水面埋立令二依ル處分事項」, 『朝鮮總督府官報』 1933년 11월 21일.
155) 평택도두지구 토지반환대책위원회, 「우리는 왜 무상양도를 주장하는가!」 『농성소식』 제4호, 1988년 12월 9일.
156) 『고덕면지』, 2007, 평택문화원·고덕면지편찬위원회, p.211.
157) 평택도두지구 토지반환대책위원회, 「우리는 왜 무상양도를 주장하는가!」 『농성소식』 제4호, 1988년 12월 9일.
158) 『경기일보』 2000년 1월 4일.
159) 김영미, 앞의 논문, 『한국사연구』162, pp.393~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