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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불교유적>만기사萬奇寺>창건과 내력
■ 창건과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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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사는 942년(태조 25)에 남대사南大師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동천리에서 창건됐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동천리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으며 1900년대 초에 발간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서도 “옛 터가 북면 동천리에 있다. 수십 년 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라고 언급돼 있다. 이전에 발간된 읍지류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1843년과 1899년에는 전혀 없는 기록이며 1871년 제작된 진위현 지도에서도 현재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웅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의 양 손과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복원한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 폐사됐다가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사찰에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유물인 만기사철조여래좌상의 양식이나 규모로 보아 창건 당시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웅전이 있는 곳의 축대에 같이 쌓았던 약사여래상의 일부나 석탑, 승탑 부재들을 보더라도 만기사는 비교적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만기사는 최근에 사역寺域을 늘인 결과일 뿐이며 결코 큰 규모의 사찰이 들어설 자리는 아니다. 만기사의 원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좀 더 연구할 과제다.
만기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이 책의 불우佛宇조에 ‘만기사가 무봉산舞鳳山에 있다’라고 간단히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1843년 편찬된 『진위읍지』에는 “절 북쪽에 있는 돌구멍에서 맑은 샘물이 나오는데 맛이 아주 달고 차가웠다. 옛날 세조가 이 절에 수레를 멈추어놓고 우물에 나가 물을 마셔보고 ‘맛이 단 샘물이니 감로천甘露泉이라고 하라’고 해 사람들이 어정御井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후 1843년 편찬된 『진위읍지』에도 ‘만기사가 무봉산 아래에 있다’고 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1899년에 편찬된 『진위읍지』에도 여전히 “현 북쪽 5리 무봉산 남쪽 산기슭에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기록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만기사의 사세寺勢가 유지됐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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