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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택지역의 인구에 관한 사료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1454년 편찬)
에 따르면 진위현 인구는 221호 535명이고, 시위군待衛軍이 10명, 선군船軍이 51명이다.
지금의 서탄면과 진위면 인구를 포함한 숫자로 당시 현은 매우 작은 규모임을 알 수 있다.
1760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전국의 읍지를 종합 정리한 책으로 290여개 읍의 현
황이 수록돼 있다. 그중 진위현은 10개면 33리에 1987호, 인구 4813명이 거주했다.3)
조선후기에는 보다 정밀한 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정확한 호구조사는 조세징수뿐 아니
라 군역과 부역을 부과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1789년(정조 13)에 작성한 『호구총수』에 따
르면 18세기 후반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1,708,908호에 7,214,453명이었다. 평택지역에
는 33,093명이 살았는데 조선 초에 비해 무려 10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조선 후기 평
택지역의 인구증가에는 간척사업이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하천 변에 남아 있는 궁리, 평
궁리, 신궁리, 삼궁원, 궁논들, 수어청들과 같은 지명들은 국가나 왕실이 주도한 간척사업
의 흔적이다.
[표1] 여지도서 상의 진위현 인구 4)
(단위 : 호, 명)
면 | 리 | 호수 | 인구 | 현재지명 | ||
---|---|---|---|---|---|---|
남 | 여 | 계 | ||||
마산馬山 | 상上 | 28 | 48 | 22 | 70 | 진위면 마산리 |
하下 | 87 | 151 | 120 | 271 | 진위면 마산리 | |
성북城北 | 동천東泉 | 36 | 49 | 42 | 91 | 진위면 동천리 |
청호靑好 | 47 | 54 | 46 | 100 | 진위면 청호리 | |
갈곶葛串 | 30 | 42 | 37 | 79 | 진위면 갈곶리 | |
성북城北 | 가곡佳谷 | 30 | 41 | 31 | 72 | 가곡리 |
준북浚北 | 30 | 54 | 49 | 103 | 하북리 | |
견산見山 | 114 | 120 | 129 | 149 | 견산리 | |
서西 | 궁리宮里 | 20 | 41 | 38 | 79 | 고덕면 궁리 |
신리新里 | 70 | 93 | 61 | 154 | 진위면 신리 | |
금암金岩 | 40 | 59 | 48 | 107 | 서탄면 금암리 | |
마두馬頭 | 35 | 41 | 51 | 92 | 서탄면 마두리 | |
내천奈川 | 50 | 41 | 50 | 91 | 서탄면 내천리 | |
야막野幕 | 120 | 130 | 120 | 250 | 진위면 야막리 | |
탄현炭峴 | 상上 | 75 | 99 | 91 | 190 | 지산동 |
하下 | 75 | 66 | 62 | 128 | 지산동 | |
사四 | 74 | 83 | 82 | 165 | 신장동 | |
오五 | 42 | 66 | 52 | 118 | 신장동 | |
송장松莊 | 동령東嶺 | 62 | 58 | 51 | 109 | 이충동 |
여방餘方 | 사창司倉 | 50 | 45 | 50 | 95 | 도원동 |
갈원葛院 | 70 | 61 | 58 | 119 | 도원동 | |
서재西才 | 60 | 53 | 55 | 108 | 동삭동 | |
율지栗枝 | 30 | 41 | 39 | 80 | 동삭동 | |
영신永新 | 30 | 52 | 51 | 103 | 동삭동 | |
방효方孝 | 30 | 45 | 52 | 97 | 송탄동 | |
병파丙坡 | 통복通伏 | 65 | 51 | 66 | 117 | 통복동 |
비전碑前 | 58 | 62 | 59 | 121 | 비전동 | |
어인남於人南 | 30 | 49 | 43 | 92 | 비전동 | |
성남城南 | 잔교殘橋 | 95 | 140 | 123 | 263 | 세교동 |
고두高頭 | 동청東靑 | 20 | 42 | 23 | 65 | 고덕면 동청리 |
옹정瓮井 | 64 | 61 | 68 | 129 | 고덕면 좌교리 | |
현내縣內 | 동東 | 160 | 277 | 239 | 516 | 진위면 봉남리 |
서西 | 160 | 202 | 188 | 390 | 진위면 봉남리 | |
10면面 | 33리里 | 1,987 | 2,517 | 2,296 | 4,813 |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고 평택역, 서정리역 주변에 근대도시가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미개간지의 간척사업도 인구증가를 촉진했다. 1924년 진위군(현
평택시) 인구조사를 보면 평택지역에는 11,577호에 63,090명이 거주해 호구총수를 작성
했던 130여 년 전보다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났다. 평택역 주변 도심지역인 병남면이 7,192
명으로 가장 많았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평택보다 인구가 많았던 송탄면은 5,777명 이
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많았다. 인구조사표에는 일본인이 180호 626명이
었으며 중국인은 110명이었다. 당시 평택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은 관료·교사·경찰·지
주·마름 등 다양했고 중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단신으로 건너온 사람이 많아 여성보다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상업과 간척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1933년이 되어서야 평택지역 인구는 7만 명을 돌파했다. 1948년에도 10만 명(92,751명)이 채 되
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 중인 1951~52년 사이 신장동과 팽성읍 일대에 미군기지가 주둔하자 월남한 피난민들이 평택 곳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5)
한국연감(1956년도) 통계에 나타난 해방 후 평택인구는 101,307명이고 1960년 인구는 15만 5천여 명으로 1955년 이후 연평균 5.98%의 인구증가율을 보인다. 이는 해방 후 이북 월남민이 유입되고 1·4후퇴 시 이북 피난민의 집단 정착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후 팽성읍 K-6 캠프 험프리스와 신장동 K-55 오산에어베이스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유동인구가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인구가 급증해 1966년까지 연평균 3.53%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1970년 상주인구 조사가 시작되면서부터 1975년까지 연평균 2.54%의 높은 증가율을 나타냈다.
도시지역에서의 인구증가로 1981년 7월 1일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 분리됐고 1986년 1월 1일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 분리됐다. 주요 택지개발사업이 있었던 1990년대 전반기에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2.95%로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경기도내 주변 도시에서의 신도시개발 영향으로 2000년대 들어서는 1%대의 인구성장율로 정체를 보이고 있다.
인구밀도는 1980년 570.1인/㎢에서 1990년 619.5인/㎢, 2000년 793.9인/㎢로 높아졌고 2010년 923.0인/㎢으로 점차 과밀해지고 있으나 경기도의 2010년 평균 1,187인/㎢ 보다는 낮고, 경기도 남부 도시평균 1,518인/㎢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6)
[표2] 평택시 인구현황
(단위 : 명)
연도 | 경기도 인구수 | 평택시 인구수 | 남자 | 여자 | 성비 | 인구 증가율(%) | 인구 밀도 (인/㎢) | 행정구역 (㎢) |
---|---|---|---|---|---|---|---|---|
1955 | 2,359,558 | 120,021 | 58,833 | 61,188 | 0.96 | - | - | - |
1960 | 2,748,765 | 155,879 | 78,223 | 77,656 | 1.01 | 5.98 | - | - |
1966 | 3,102,325 | 188,863 | 95,079 | 93,784 | 1.01 | 3.53 | - | - |
1970 | 3,353,272 | 199,700 | 97,443 | 102,257 | 0.95 | 1.43 | - | - |
1975 | 4,034,707 | 225,077 | 112,465 | 112,612 | 1.00 | 2.54 | - | - |
1980 | 4,930,335 | 234,356 | 117,129 | 117,227 | 1.00 | 0.82 | 570.1 | 410.68 |
1985 | 4,792,617 | 246,870 | 124,358 | 122,512 | 1.02 | 1.07 | 572.0 | 431.64 |
1990 | 6,154,359 | 271,826 | 137,205 | 134,621 | 1.02 | 2.02 | 619.5 | 438.80 |
1995 | 7,637,942 | 311,940 | 157,703 | 154,237 | 1.02 | 2.95 | 737.3 | 437.58 |
2000 | 8,937,752 | 342,806 | 172,052 | 170,754 | 1.01 | 1.98 | 793.9 | 452.31 |
2005 | 10,341,006 | 374,262 | 189,554 | 184,708 | 1.03 | 1.84 | 864.0 | 452.20 |
2010 | 11,196,053 | 381,731 | 193,189 | 188,542 | 1.02 | 0.40 | 923.0 | 454.63 |
[그림 1] 경기도와 평택시 인구증가 비교
경기도의 인구증가추세와 비교하기 위해 [그림 1]을 보면, 증가추세선의 각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1990년대는 성남시, 고양시 등의 신도시 건설과 2000년대 용인시와 화성시에서 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경기도인구가 특정 도시에서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도시의 인구성장은 상대적으로 평택시의 인구증가를 정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표 2]7)에서 인구의 성비를 보면, 1955년 6·25 한국전쟁 직후 성비는 0.96으로 여성인구비율이 높았으며 1980년 1.0으로 균형을 이루어 1985년은 성비가 1.02로서 남성인구가 증가했다. 2010년까지도 여성인구보다 남성인구가 많다.
주석
3) 송탄시, 『송탄시사(松炭市史)』, 1994. pp.75~77.
4) 송탄시, 『송탄시사(松炭市史)』, 1994. p.76.
5) 김해규, 『평택 역사산책』, 평택시민신문, 2013, p.130.
6) 평택시, 『2011평택통계연보』, 2012, p.453.
7) 통계청, 『인구총조사』, 각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