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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항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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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후반 무신정권기에 전국적으로 농민·천민 항쟁이 일어났다. 이들 항쟁은 중앙정치체제 혼란, 지방관의 수탈로 인한 수취체제 문란, 권세가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유망민 증가, 신분제 문란 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피지배층의 의식수준이 향상돼 체념보다는 변혁과 개혁을 요구하게 된 것이 봉기가 확산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반란은 조위총이 중심이 된 서북지방의 농민봉기, 망이·망소이가 이끄는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죽동의 전주지방 농민봉기, 김사미와 효심의 운문·초전민의 봉기, 그리고 신라부흥운동을 부르짖는 이비·패좌의 경주지방 농민봉기와 무인정권 실세였던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의 난 등이 있었다.

이 항쟁들은 최충헌 정권의 철저한 진압으로 결국 수습됐다. 1196년(명종 26)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농민항쟁을 효과적으로 진압했으며, 신종·희종 대를 거치면서 왕권을 무력하게 하고 최충헌 독재체제를 확립해 고종 대는 최씨 무인정권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고종 3년부터 시작된 북방 이민족의 고려 침입으로 인해 전국이 혼란에 휩싸이게 됐다. 신종 대 경주지역 농민봉기로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농민들은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사회가 동요하자 다시 봉기하기 시작했다. 진위현민의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양수척·개경 승도·전주 군인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후 서경의 최광수, 의주에서 한 순과 다지의 반란이 있었다.

고려시대 양수척(조선시대의 백정)은 수초水草를 따라 옮겨 살며 수렵과 유기장柳器匠과 도살업 등에 종사하는 천민계급으로 관적官籍과 부역이 없었다. 그런데 무신집정자의 한 사람인 이의민 집권 시기에 그의 아들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때 양수척들을 총애 하는 기생 자운선에 소속시키고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최충헌이 쿠데타로 실권을 잡 은 이후, 최충헌 또한 자운선을 첩으로 삼고 인구를 계산해 공물을 더욱 심하게 받았다. 사 원세력의 백성 침탈도 심각했다. 이에 양수척은 착취와 수탈을 이기지 못해 크게 원망하고 거란이 침입하자 바로 투항해 그들의 길잡이가 됐다. 양수척의 반란은 수탈에 대한 저항으 로 일어난 일종의 민란으로 볼 수 있지만, 외세의 편에 서서 고려침략에 도움을 주었다.

이어 승려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고종 3년 8∼9월에 서북·동북계를 횡행하던 거란군은 11월에 대동강을 건너 개경까지 위협하게 되자 정부는 거란군 침입을 막기 위해 수만 명의 승려들을 충원시켰다. 이들 중 개경 승려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잦은 공역에 시달린데 원한을 품고 최충헌을 살해하려 했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가종교였던 만큼 사원 은 많은 토지를 왕실과 귀족으로부터 기부 받아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승려들 중에서도 일부 지배층에 불과했고 대다수 승려들은 사원전을 경작하고, 승군으로 전투에 징발되거나 갖은 잡역에 혹사당해 농민들과 같은 고달픈 처지였다. 그런 승려들이 위정자에 반감을 가지고 거란 침입을 기화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승도들은 최충헌의 가병家兵에 밀려 800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수습됐다.

거란 침입기에 일어났던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지방관이나 토호의 수탈, 권세가의 토지 겸병, 그리고 최충헌 독재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교정도감 등 새로운 권력기구 창출로 농 민 부담이 늘어나는 고려사회의 내부 모순이 외세침입이라는 혼란기에 농민봉기로 폭발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서경에서는 최광수가 고려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고구려 부흥을 계획 했다. 한순·다지가 중심이 돼 봉기한 의주지역은 최충헌의 죽음을 빌미로 일어났지만 정 부군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이웃 동진국東眞國의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움직임과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고려민의 지배층에 대한 반감은 국가를 부정하거나 외세를 끌어들일 정도의 위급한 상황임을 나타내며 최충헌 정 권의 반민중적인 정책과 성격이 드러난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