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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현민들은 진위현에서 시작해 종덕창·하양창의 곡식을 확보하고 광주로 진출해 세력의 범위를 넓히려고 했다. 거란이 개경을 침략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고려정부는 민란을 막기 위해 즉시 지방군을 동원했다. 『고려사』 한순韓恂 전에 의하면 당시 “고종은 낭장 권득재와 산원 김광계 등을 파견해 안찰사 최박과 함께 광주와 수주 두 고을의 군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 다시 충청도와 양주도의 군사를 징발해 재차 공격해 이당필과 김예를 잡으니 그들의 무리가 흩어져 달아나고, 이장대도 상주로 달아났으나 안찰사가 그를 사로잡아 서울로 보내어 모두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당시 진위현민의 수가 노인과 어린아이를 합해 남자 535명으로 나와 있는데 천명 이상의 정규군이 진위현민을 막지 못한 것은 이들의 봉기에 주변 농민들도 많이 가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수주 속현의 대다수 주민들이 가담했으리라 추정된다. 이에 정부는 2,000여 명이나 되는 충청도와 양주도의 군사를 더 징발해 겨우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진위현민의 항쟁은 외세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함에 실망해 자치적으로 외세를 막고자 방어군을 편성한 의병이었다. 정부는 거란의 침입보다 농민봉기
의 진압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물론 진위현민의 봉기에 반정부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정부의 허락 없이 관아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광주로 진격한 것으로
보아 고려 지배층에 대한 불신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국가를 지키
자는 것이었고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가세했다. 또한 의병이라고 칭해 외세방어의 목표를
드러내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진위현민의 봉기는 후일 반외세를 외치며 고려 각지에
농민들이 몽고와 싸우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