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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헌과 객사가 그려진 진위현지도(1872년 지방지도) |
조선시대 지방 통치는 수령과 양반들이 중심이 됐고 향리들은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지방통치를 위한 기구들은 대부분 행정중심지인 읍치에 존재했는데 우선 궐패闕牌와 전패殿牌가 있었다. 수령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찾아보고 사신이나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이 머무는 객사, 그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과 수령 및 그의 가족이 사는 내아, 향리들이 근무하는 질청, 고을 양반들의 집합소인 향청과 교육 및 의례 장소인 향교 등이 있다.
평택시에도 조선시대 진위현과 평택현의 관아터가 있었는데 평택현에는 객사·향교가 남아 있고, 진위현에는 향교가 남아 있다. 여기서는 읍지와 고지도 그리고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피면서 평택현과 진위현의 읍치, 그리고 관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조선시대에 읍치란 관아가 있는 마을과 같은 행정중심지를 의미한다. 읍치에는 수령이 거주했으며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향리들과 군관軍官, 관노비官奴婢 등이 모여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반들 대부분은 읍치에 거주하지 않았다.
진위현의 읍치는 기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진위의 옛 명칭은 부산현釜山縣이었는데 1899년 『읍지』에는 부성釜城이 현의 서편으로 3리에 있으며 고려 때 읍이 있던 터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현재의 진위중학교 뒷산에는 능선을 따라 쌓은 성터가 남아있다. 이 성터가 바로 고려시대 읍치가 있던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무봉산舞鳳山이 동편으로 5리라고 돼 있는 것도 고려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는 지금의 진위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봉남리鳳南里가 분명하다. 하지만 서쪽의 부성에서 이곳으로 언제 읍치가 옮겨졌는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843년 『읍지』는 관아를 중수, 개축한 일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했음에도 읍치의 이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 그러므로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진위현에 있던 공해公廨, 즉 관아건물은 『읍지』에 동헌·아사·사창·빙고·관청고·사직단·여단·책방·내아·문루·현사·장청·인리청 등이 10칸 내외고, 신축한 것이 188칸, 정집이 56칸, 보수한 것이 46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1870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따라 전국적으로 공해를 보수케 했는데, 진위현도 이 때 중수해 3년 만에 완성했다. 지금은 향교를 제외하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읍치가 바뀐 진위현과는 달리 평택현 읍치는 조선시대 내내 현재 부용산의 남쪽, 향교와 객사 사이에 있었다. 평택현의 읍치와 관아에 대한 자료는 『팽성지』가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동헌·객사·사직단·향교·여단·성황단·사창 등의 위치만 있고 관아의 중수에 대한 자료는 드물다. 따라서 지도 등을 통해 유추할 필요가 있는데 고지도로 가장 자세한 1872년 「평택현 지도」, 『팽성지』와 비교해보면 질청과 장청이 더 나온다. 현재는 객
사와 향교를 제외하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