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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향교 |
| 진위향교 배치도 |
조선은 유교이념을 널리 보급하고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교 설립을 진흥했다.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수령 업무에 포함시켜 근무평가에 반영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제점도 많았다. 우선 유교지식이 풍부한 교관(또는 훈도)을 확보하지 못해 교육의 질이 저하됐고 학생들은 향교에서의 교육을 기피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향교는 관아 근처에 있는데 양반가의 자제들은 대부분 읍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통학이 어려웠다. 조선후기에는 점차 증가하게 된 서원이 유학교육을 담당하면서 향교의 교육적 역할이 쇠퇴했다.
교육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향교는 계속 존재했다. 향교가 지닌 다른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향교에서는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을 제사하는 행사를 실시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실시한 알성례謁聖禮와 봄·가을에 실시하는 석전제釋奠祭가 향교의 주된 행사였다. 양반들의 주도하에 군·현단위로 실시되던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도 대부분 향교에서 실시됐다. 또한 향교의 유생으로 등록된 자들에게는 군역 면제 등의 신분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향교는 지속적으로 유지됐다. 그 결과 향교는 다른 관아들과 달리 지금까지도 많은 수가 보존됐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330여 군현에 모두 향교를 설치했다. 물론 진위현과 평택현에도 향교가 있었다. 향교는 관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 주변에 있었다.
이는 진위 향교나 평택 향교의 위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방 향교는 크게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기관인 명륜당으로 구성되는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양식이 일반적이다. 진위항교와 평택향교 역시 이런 구조다.
진위향교는 조선 초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퇴락하자 1635년 향교 유생들
이 조정에 향교의 중건을 요청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향교에 불이 나자 당시 향리였던
최응수崔應守가 위판을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두어 칸의 건물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이후 현령 남두극南斗極이 재물과 질기와를 모아 향교를 다시 짓기 시작했고 다음 현령인
이산뢰李山賚가 1647년에 완성했다. 현령 황종림이 1843년 명륜당을 고쳐 짓고, 전사청도
보수했으며, 현령 박장암은 1837년에 전사청을 고쳐지었다.
| 평택향교 |
평택향교도 조선 초기에 세워졌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팽성지』에 의하면
1445년(세종 27)에 증설됐고, 1613년과 1623년 사이에 송시혁 현감이 명륜당을 지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가, 1642년(인조 20년) 이성항 현감이 유적儒籍을 갖추었고, 1651년
이전 황도명 현감 때 동재와 서재를, 1662년 심익선 현감이 향교의 규범과 제사에 쓰일 제
기 및 제복, 공급할 용품 등 일체를 갖추게 했다. 정추 현감이 1685년(숙종 11) 8월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 및 내·외삼문 중건에 착공해 이듬해 4월에 낙성했다.61) 1775년(영조 51)에도 중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농림학교로 사용하기 위해 외삼문을 철거당하는 등의 수난도 있었다. 1941년, 1965년, 1972년에 중수됐고, 1979년에는 유림이 협찬해 외삼문, 내삼문, 동·서재, 홍살문 등을 복원하고 1986년에는 명륜당이 중수됐다.
‘사직단社稷壇’은 농사를 짓는데 가장 중요한 토지신을 모시는 ‘사社’와 곡식을 담당했던 ‘후직后稷’,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직稷’이 합쳐진 곳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으로도 국왕의 위패를 모신 동쪽의 종묘와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해서 경복궁 서편지역에,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배치했다. 진위현의 사직단은 처음에는 현의 서편 1리에 있었으나 뒤에는 원칙에 맞지 않게 현의 동편 1리로 옮겼다. 평택현의 사직단은 향교 뒤 부용산에 있었다. 『팽성지』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여단厲壇’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나 지방의 군현에서 제사를 지내주던 제단이다. 보통은 궁궐이나 동헌의 북쪽에 있다. 진위현 여단은 현 서편으로 2리에 있다고 하는데 『읍지』에 딸린 지도를 보면 무봉산에 있었다. 평택현의 여단은 평택현 지도에 동헌 뒤 부용산 사직단 동쪽에 있었다.
성황 또는 서낭은 마을 수호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황을 모시는 성황당城隍堂은 조선시대 읍지나 지도에 기록됐고, 국가에서 제사 법령을 제정해 놓았다. 성황당과 관련한 문서들에도 그 지방의 수령이 직접 관장했음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성황당은 관아시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진위현 성황당은 진위현 지도에 봉남리와 향교 사이 작은 골짜기에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으나 현재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평택현 성황당은 평택현 지도나 『팽성지』에 보이지 않는다.
| 진위현 지도에 기록된 사창 |
사창司倉은 관에서 거둔 양곡을 보관하는 곳으로 진위현의 사창은 봉남리, 고잔, 봉남리 다리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택현의 사창은 『팽성지』나 평택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 진위현과 수원부의 세곡 일부는 고덕면 해창리의 해창海倉에 모였다. 현재 아산시 공세리에 있었던 공세창貢稅倉에서 충청 도 북부지역의 세곡과 함께 조운선에 실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서울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 으로 옮겨졌다.
주석
61) 이상은 『팽성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