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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과 향리의 지방통치 - 향청·질청·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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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객사

| 팽성객사 |



고을의 수령은 중앙으로부터 막강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파견됐지만 임기는 길지 않았 다. 조선전기 규정은 5∼6년이었으나 실제로는 2년 정도에 그쳤으며 조선후기에는 평균 1 년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수령은 상피相避 등의 제도적 제한으로 인해 고향으로 부임할 수 없었다. 오늘날 시장 등이 자신의 연고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과는 반대다. 수령은 부임한 지역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외지인으로 지역을 통치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실질적인 지방 통치는 수령이 혼자 담당할 수 없었으며 자연스럽게 수 령을 보좌하는 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세력 중 하나는 지방 양반이다. 각 지역의 양반은 사회적·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군·현 또는 면·리 단위에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령은 전문적인 실무지식으로 향촌통치 업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향리층도 필요했다. 이들은 읍치 지역에 거주하면서 향리직과 그에 관련한 행정경험과 지식을 세습하곤 했다.57) 조선시대 지방 통치는 중앙으로부터의 일방적인 통치가 아닌 수령과 향촌의 양반과 향리가 함께 운영하는 구조였다.58)
양반들의 향촌 지배는 향청鄕廳 또는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향청은 15세기 후반부터는 고을의 중요 통치기구로 자리 잡아 갔다. 양반들은 고을과 마을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향회鄕會’라는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지방의 풍속을 단속하고 유교적 가치관을 민간에게 전파하기 위해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만들기도 했다. 향회에는 아무나 참여할 수 없었고 고을에서도 양반으로 인정받는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 폐쇄적인 모임은 자신들의 명부인 향안鄕案을 만들게 되는데 향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향원鄕員이며 고을의 진짜 양반들이었다. 향회 임원이면서 향청에 나아가 수령의 자문역할을 하는 지역양반층을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이라고 했다.59)

향청이 수령의 동헌에 버금가는 이아二衙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자, 읍치에 향청 건물이 자리 잡게 됐다. 향청은 객사나 동헌처럼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했으며 좌수와 별감만이 아 니라 지방통치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향청은 특히 수세收稅에 관여했다. 이 런 사실은 『아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데 세금을 내지 않은 백성들을 데려다가 회초리를 때 리는 주체는 향리가 아니라 향청이었다. 향청은 환곡 운영·잡세 징수·군역 부과·송사 판결도 담당하는 등 권한이 매우 컸다. 조선후기 양반사회 변화로 인해 향청의 기능이 쇠 퇴하고 좌수·별감의 지위도 크게 떨어졌다.

향청의 운영을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했으며 잡세를 거두거나 부근의 절을 지정해 종이와 기름 등의 잡물을 거두기도 했다. 이런 절을 속사屬寺라 한다. 평택현의 읍지인 『팽성지』에 의하면 ‘망한사望漢寺’도 이러한 속사 기능을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평택현뿐 아니라 진 위현의 향청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양반 뿐 아니라 향리들도 지방통치의 주역이었다. 질청秩廳(또는 人吏廳, 作廳)은 아전들이 모여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고려시대 속현에서 향리들이 고을의 대소사를 처리하 던 사司에서 유래했는데, 조선시대에 관아 기구로 편입돼 수령의 지휘를 받는 부속기구가 됐다.

진위현의 질청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진위초등학교 운동장 지역으로 추정된다. 진위 초등학교 부지에는 학교 건물 뒤에 매우 넓은 공간이 남아 있어서 진위현의 옛 관아가 넓 은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택현의 질청도 남아 있지 않은데 평택현 지도와 1910년의 지도를 현지 지형과 비교해 살펴보면 오늘날 부용초등학교 동편쯤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 정된다.

또한 고을 아전들은 관아 안에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사당인 ‘부군당府君堂’을 두었다. 여 기에는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소하蕭何를 주신으로 모셨다. 일개 아전 출신으로 재상까지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성현 지도에는 관아 뒤쪽이자 부용산 남쪽 에 부군당이 있었다.60)



주석

57) 권기중, 『조선시대 향리와 지방사회』, 경인문화사, 2010.
58) 금성윤, 「오횡묵吳宖默(1834~?)을 통해서 본 수령 군현통치의 과정과 전략」 『조선시대사학보』 53, 2010.
59)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88.
60) 부군당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신앙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는 어느 쪽에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군현의 실질적인 행정은 아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아전들의 사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