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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전래초기의 신앙집회 |
18세기 후반에는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의 세계관 및 방법론에 대한 불만과 반성의 조짐이 나타났으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학 또는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었다. 안정복安鼎福은 ‘서학서가 선조宣祖 말년에 이미 동쪽으로 전해져서 유명한 학자로서 보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천주교의 조선 전래는 외국 선교사의 포교활동이 아닌 학문적 호기심을 통해 발생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서학 수용과 전파 중심에는 주로 성호星湖 좌파에 속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천주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천 여 명의 신도가 생겼으며 주문모 신부가 오기 전에 이미 신도 수는 약 4천 명으로 증가해 몇 해 후에는 1만 명에 이르렀다. 천주교는 양반뿐 아니라 농부·고공·장인 등 백성들에게까지 확산됐다.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보낸 장서長書에서 ‘기호畿湖 지방에는 더욱 널리 퍼져 촌리村里 어느 곳도 무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기호 지방 곳곳에 천주교가 전파됐다.
천주교의 전래와 확산은 조선사회에 사회적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천주교 신앙과 조상에 대한 유교식 제사가 충돌했다. 조선 성리학에서 효孝는 충忠과 함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행동 규범이었다. 문제가 됐던 것은 바로 부모가 죽은 뒤의 효행인 제사였다. 제사는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사망한 부모와 선조를 살아 있을 때와 같이 공경해 효를 이어가는 의례형식이었다. 이 제사에서 사용하는 신주神主에 대한 해석에서 천주교와 유교는 차이를 보였다. 신주는 곧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신상神像이기 때문에 미신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천주교의 생각이었다.
전래된 천주교 신앙과 토착적 유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개념 및 해석의 불일치 문제는 일
찍이 중국에서도 오랫동안 문제였다.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
느냐는 난제에 봉착해 백 년이나 논쟁을 벌였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의례들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한국·중국·일본 등 유교 문화권 극동지방
에의 선교는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전통의 유교와 전래된 천주교가 충돌해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이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
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논란이 있었고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과 정미반회丁未泮會 사
건 등이 있었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명령에 따라 진산珍山에 살던 윤지충尹持忠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1791년 5월 어머니 권씨權氏가 사망했을 때는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았고 8월 그믐에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그의 외종형 권상연
權尙然도 죽은 고모의 신주를 불태웠다.
이 사실은 친척과 이웃 주민들이 두 사람을 아비도 임금도 모르는 불효자라고 고발함으
로써 알려지게 됐다. 이 사건은 당시 제사를 통한 조상 숭배를 신앙으로 여기던 유교사회
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정에서는 충효를 국시國是로 하는 조정에 대한 도전으
로 받아들였다. 이후 조정에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남
인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서학을 믿거나 두둔하던 세력인 신서파信西派와 이에 반대해 홍
의호·홍낙안 등 서학과 그것을 믿는 자들을 공격하는 세력인 공서파攻西派가 대립했다.
이 대립은 10년 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남인계 신서파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때까지 계
속됐다.
광주廣州와 한산韓山으로 피신한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자 10월 26일 자
수했으며 전주 감영으로 이송돼 문초를 받았다. 11월 3일 교주로 고발된 권일신과 서학서
를 들여온 이승훈이 체포됐고, 이어 서울에서 최필공 등이, 충청도에서는 이존창 등이 체
포됐다.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자신들의 행동이 천주교 교리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주장하면
서 배교를 거부해 11월 13일 처형당했다. 이승훈은 배교했으나 면직됐고 권일신은 유배 가
는 도중 사망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배교하고 석방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가 불태워졌으며 홍문관의 서학서도 불태워졌다.
신해박해辛亥迫害 또는 신해교난辛亥敎難이다.
1800년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고 서학과 천주교를 믿던 실학자들을 아끼던 정조가 갑자기 죽은 뒤 정순왕후貞順王后가 11세의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2월부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신유박해辛酉迫害다.
이후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로 낙인찍히고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는 기존 윤리 질서와 사회 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행하는 불온세력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식됐다. 조상 제사를 부인하게 되자 유학과 천주교 신앙을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이해했던 초기 교회 신도들은 교회와 정부로부터 모두 배격 받고 있음을 알고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거나 멀리했으며 탄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천주교 선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지식층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는 것이 어렵게 되면서 천주교는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