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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영정 |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사람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며,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동욱東郁이고, 어머니 여주이씨는 실학자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그는 정치가이자 학자로 유명한 정약용丁若鏞의 누이가 되는 나주정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비록 남인에 속해 권력의 핵심에 있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성취의 가족 배경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1780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교유하면서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벽李檗과 사귀게 돼 학문으로써 천주교를 배우게 됐으며 1783년에는 서장관으로 청에 가게 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 북경에서 약 40일 간 머물면서 북경의 천주교회인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1월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됐다.
1784년 3월 24일 교리서적·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을 갖고 귀국했다. 귀국 후 이벽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시작으로 정약전·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최인길·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했다.
1785년 그들과 상의해 김범우의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가짐으
로써 신자공동체를 형성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1785년 봄 형조의 금리禁吏가 교회를 노름방으로 의심해 집회 참석자들을 체포하고 압수
한 천주교 서적과 화상畵像 등을 형조로 압송했다.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 심문 도중 이
승훈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
를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교회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791년 6월 24일 이승훈은 평택현감으로 임명됐다. 평택현은 지금의 팽성읍 지역이다.
이승훈의 평택현감 재직 기간은 매우 짧았다.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승정원에서 1785년 을
사추조적발 사건을 재론하면서 의금부에서 이승훈을 죄인으로 거론해 1791년 11월 8일 4
개월여 만에 평택현감 직에서 물러났다.
더구나 1792년(정조 16)에는 이승훈이 평택현감으로 재직 시 향교의 문묘(현재 팽성읍
객사리)에 절하지 않은 것을 평택 유생들이 뒤늦게 문제 삼았다. 평택현감 이승훈의 성묘
불배不拜 사건이다. 고을에 수령이 부임하면 3일 내에 성묘에 분향 배례 하는 것이 관례요
불문율이다. 이승훈은 보름이 지나도록 그것을 하지 않았다. 또한 향교에 비가 새자 비로
소 봉심을 했으나 봉심 때는 배례를 하지 않는다는 옛날 규정을 들어 이때도 배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승훈이 배례를 하지 않자 평택 유생 조상본趙常本·권위權瑋·정언택鄭彦宅 등 삼정사三正士가 성균관에 연명으로 통문을 보내 이승훈의 죄상을 성토했다. 당시 유생들이 돌린 통
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훈이 본 고을의 수령이 돼 관아에 있을 때 매양 밤중에 정화수를 떠놓고 고깔 쓰고 하느님께 합장 축원하며 땅에 엎드려 무수 재배하니 거동이 특이합니다. 수령이 재임 후 삼일 안에 성묘(聖 廟, 공자가 모셔진 향교의 대성전)에 배알함은 늘상 행해지던 예이거늘, 승훈은 도착한지 몇 달이 지나도 성묘에 배알하지 않았습니다. 본교 유생이 봉심(奉審)하기를 여러 번 청하니, 마지못해 사 당 문에 들어가 머리를 고치어 쳐다 볼 뿐이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향교 유림들이 규례를 들어 말하기를, ‘수령이 재임해 성묘 배알함은 삼 일이 지나지 않음은 모든 고을이 다 같은 것이어늘, 세 달 만에 향교에 와서 각기병(脚氣病)을 칭탁해 절을 아니 하니 슬프다. 각기병이 있는 자 어찌 하느님께 절하며 유독 성묘 아래에는 절을 못하리요’ 했습니다.”86)
고을 수령이 관례를 어기고 공자의 사당에 배례하지 않는 행위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반
하는 매우 큰일이었다. 결국 1792년 2월 안핵어사按覈御使를 평택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케 했다. 그런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金熙采는 이승훈의 친척 재종再從(매부)으로서 이승훈을 두둔하기 위해 이승훈이 성묘에 배례를 한 것처럼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는 한편 문제를 제기한 평택 권위 등의 유생들을 오히려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했다.87)
이승훈의 불배사건을 통해 평택지역 양반들의 향촌활동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18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 때에 진위를 비롯한 송탄과 양성 지역 양반들이 대거 참여했다가 실패함으로써 평택지역은 큰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불배사건이 발생하자 평택현의 유림들이 이를 문제 삼고 집단행동을 했던 것을 볼 때 이 지역 양반들의 향촌활동이 여전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평택 유림들의 패배였다. 이승훈의 편을 든 안핵어사 김희채의 보고로 인해 문제를 제기했던 평택현의 양반 권위와 가족들은 큰 피해를 당했다. 권위는 관리를 모함했다는 죄명을 쓰고 심문 중 형장을 맞아 사망했고 아들들 역시 역모의 죄를 쓰고 섬으로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승훈의 불배를 조정에 고한 평택의 양반들 홍병원洪秉元·조상본趙常本·정상훈鄭尙勳·정언택鄭彦宅은 형장을 당한 뒤 귀양 갔다. 이후 조상본·권위·정언택 등은 복권돼 ‘삼정사’라 불리며 유림들의 칭송을 받게 됐다. 팽성읍 함정리에는 이들을 기리는 ‘향현사鄕賢司’가 세워졌다.
이후 정조가 사망하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고 1801년 2월 10일 불배사건의 주인공으로 평택현감을 지냈던 이승훈도 의금부에 구금됐다. 6차례에 걸친 심문을 받고 2월 26일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정약종·홍교만·홍낙민·최필공·최창현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천주교 전래는 평택현을 비롯한 조선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앙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후기 통치이념은 천주교를 믿던 자들도, 그것을 막으려던 평택지역의 양반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 이승훈이 평택향교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조정에 상소한 내용 |
(한상우_국제대학교 강사)
[참고문헌]
『各司謄錄』.
『朝鮮王朝實錄』.
『平澤郡誌』.
『平澤鄕校志』.
김성우, 「임진왜란 시기 상인층의 동향과 사족층의 대응」, 『한국사학보』 8, 2000.
김성우,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 49, 2005.
김해규, 『평택 역사산책』, 평택일보사, 2013.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 강,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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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淳, 『朝鮮西學史硏究』, 一志社, 1986.
李鍾範, 「1728년 戊申亂의 性格」,『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麗大學校 民族
文化硏究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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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천주교회 70년사』
한국가톨릭대사전위원회,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주석
86) 「平澤壬子獄顚末記」 중 ‘通太學文’, 『平澤鄕校志』.
87) 『朝鮮王朝實錄』 正祖 권 34, 16년 3월 14일.